백선우라고 합니다. 오랜 벗 미주가 무사히 아기를 낳았다. 낳은 지는 좀 됐고, 지금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아이만 자라고 있는 건 아니고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된 부부도 밤잠을 설치고 무알코올 맥주의 신세계를 경험하며 최선을 다해 성실한 부모로 자라고 있는 듯 보인다. 여러 가지 이유로 오늘날 이 땅에서 부모가 되는 일도 만만찮은 일이다. 건너서 보고 들어도 아이를 갖고, 낳고, 키우는 삶을 선택한 이들치고 있는 힘을 다하지 않는 이가 없다. 있는 힘을 다해서 난임 극복 솔루션을 이행하고, ‘100일의 기적’이 찾아와 쪽잠의 생활에서 벗어나길 소망하며, 온갖 고초 속에서도 육아휴직을 방어해내기 위해 애쓴다. 임신과 출산과 양육은 정말로 끝도 없는 인내의 연속인 듯하다.

살다 보니 그 있는 힘을 다해야 하는 일을 굳이 해내겠다고 고민하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이야기를 자주 접하게 된다. 결혼 후 1년, ‘임신의 때’를 강요받는 부부도 있고, 경력을 쌓는 일과 경력이 끊어지는 일 때문에 임신과 출산을 고심하는 직장 동료, 난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같은 산부인과를 다니며 다시 한번 ‘임신 동기’가 된 대학 후배 등이 있다. 세 명의 후배는 서로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주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 힘참이 어디 힘차기만 한 것일까. 출산 이후에도 어려움은 계속된다. 한 친구는 무사히 출산하고도 잠시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며 “아기가 좋지만 싫기도 해”라는 조금 이상한 말을 했고,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했다. “이런 말을 하면 내가 엄마가 될 자격도 없다고, 남편도 가족도 생각하겠지?” 한날 그 친구와 대낮에 맥주 딱 한 병을 나눠 마시며 주고받았던 그 말들을 통해 나는 임신과 출산이 두 사람이 이룩하는 일임과 동시에 한 개인에게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강력한 모성 신화와 자식으로 완성되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구획해놓은 틀 안에서 임신과 출산과 양육을 둘러싼 일은 끔찍한 사고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연합뉴스씨앗보다 작았던 한 생명체를 웅대한 사람으로 키우기까지 부모는 ‘죽을힘’을 다한다.

임신과 출산과 양육을 결심하고 실행하기까지 수많은 고심의 경로를 거쳐야 함은 당연하다.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진다. 씨앗보다 작았던 한 생명체를 웅대한 사람으로 키우기까지 두 사람은 신체적으로, 신념적으로, 감정적으로, 이성적으로, 사회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죽을힘을 다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그 과정에 진입하기 전 임신과 출산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그만두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임신과 출산은 책임을 다하는 일이지 의무를 다하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아내, 동거녀, 여자 친구로서가 아니라 독립적인 자아로 자신의 몸에서 발생한 일을 사유하고 책임질 행위는 오롯이 그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낙태를 결정하는 이들의 사악함을 일부러 만들어낸다. 낳기까지의 괴로움이 있다면, 낳지 않기까지의 괴로움도 역시 있다. 웃는 얼굴로 낙태하는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필요에 의해 가공된 환상에 불과하다. 낙태라는 결과에 이르기까지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선택을 책임지려는 한 개인의 과정을 백지상태로 만들어버리는 이야기는 이편에서가 아니라 저편에서 완성해내는 서사다.

여성의 몸이 여성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 세상

이제 점점 밤잠이 많아지는 자식을 둔 미주와 청운 부부의 앞날에 심심한 위로를 보내고 싶다. 결혼과 임신과 출산이라는 코스를 당연히 여기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고군분투하는 직장 동료와 육아휴직을 쓰고 복직한 이후에 괜한 눈치를 보는 이, 오랜 세월 자식이 없는 삶을 꾸리(려)는 지금, 당신에게 힘을 보낸다. 자신의 몸이 ‘출산의 도구’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미 투(me too)’라고 외쳐주고 싶다. 백선우가 자라는 세상이 ‘여성의 몸이 법적으로도 온전히 여성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선우는 우리보다는 조금 더 멋진 세상에 사는 것일 테다.

기자명 김현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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