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그룹은 올해부터 계열사 노동시간을 주 35시간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 이마트, 신세계(백화점), 신세계인터내셔날 등 계열사는 1월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이다. 이남곤 신세계그룹 홍보팀 치프파트너(부장)는 “2년 전 그룹 차원에서 인사제도 개선 TF를 발족했고 그 일환으로 이뤄진 일이다. 근무시간 외 시간을 확보해주자는 취지도 있지만, 노동시간이 다른 OECD 나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긴데도 노동생산성은 떨어지는 구조를 바꾸자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한국 기업 문화도 결국 노동시간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가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업무 집중도가 높아졌다’는 평가를 직원들에게서 공통으로 들을 수 있었다. 이마트는 오전 10시~11시30분, 오후 2~4시를 ‘집중 근무시간’으로 설정해 흡연실 출입을 제한했다. 회의는 하루 전에 고지하고, 한 시간 내에 끝내며, 하루 안에 결과를 통보한다는 ‘111 시스템’을 도입했다. 오전 8시에 시작해 두세 시간을 넘기던 대표 주재 임원회의도 오전 9시에 시작해 1시간 만에 끝난다.
다만 업무와 인력은 그대로인 상황에서 노동시간을 단축하다 보니 아직은 빠듯해하는 기류도 있다. 이 회사 직원 이 아무개씨는 “더 집중해서 근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진이 빠지기도 한다(웃음). 인력 충원이 따로 없어서 걱정이 많았는데 더 지켜봐야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전문직 가운데서는 ‘최저임금 인상 효과를 피하려는 회사의 꼼수’라는 반발이 나왔다. 그동안 일해온 대로 주 40시간 일할 경우 소정근로시간(노사가 일하기로 정한 시간)은 월 209시간이다. 2020년 최저임금이 시급 1만원이 된다고 가정하면 주 40시간 근무 시 최저임금은 월 209만원(시급 1만원×소정근로시간 209시간)이 된다. 그런데 주 35시간을 일하면 소정근로시간이 월 183시간으로 줄어드니, 시급 1만원일 때 받을 수 있는 월급의 최저선은 183만원이 된다. 시급이 같을 경우 노동시간이 짧을수록 월급이 줄어든다.
물론 올해 이마트 전문직 노동자들의 월급 총액이 올랐다. 노동시간이 주 35시간으로 줄었는데도 월급이 올랐으니 시급도 법정 최저시급을 웃돈다. 하지만 노동시간을 그대로 두었을 경우를 가정하면, 올해 시급은 최저임금 시급과 큰 차이가 없다. 여기에 그동안 회사가 최저임금 수준에 맞춰 임금을 올려왔던 관행을 고려하면, 2020년까지 사측이 매년 최저임금보다 훨씬 많은 월급을 줄 리 없다는 게 일부 전문직들의 의심이다.
노동시간 단축 통해 삶의 질 개선 담보돼야
노동시간 단축, 특히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계가 줄곧 추구해온 가치였다. 노동시간 단축은 분명 혜택이지만 상대적으로 저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경우, 노동시간 단축보다 ‘더 많은 임금’에 가치를 두는 경향이 있다. 포항이동점에서 캐셔(계산원)로 근무하는 박선영 마트산업노조 이마트지부 부위원장은 “연봉 5000만원인 사람에게 노동시간을 줄여주면 그걸로 문화생활이 가능하겠지만 월 백몇십만원 받는 우리에게 시간만 주면 그 시간에 우리는 알바라도 하라는 건가?”라고 말했다. 정민정 마트산업노조 사무처장은 “이미 롯데마트 노동자들도 하루 7시간 일하고 있다. 하루 7시간 근무 체제였던 홈플러스 노동자들이 이번 임금·단체협상에서 원하는 사람에 한해 하루 8시간 근무할 수 있도록 회사에 요구해 관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라고 말했다.
인력 충원 없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노동강도가 세졌다는 체감도 노동 특성상 전문직에게 더 강하게 다가오는 것으로 보인다. 캐셔의 경우 노동시간 단축으로 준비·마감 시간이 각각 15분에서 10분으로 줄었다. 하루 30분씩 두 번 부여하던 휴식시간도 20분씩 두 번으로 줄었다. 제품 진열 담당 직원 업무량도 늘었다는 주장이 나온다. 전수찬 마트산업노조 이마트지부장은 “그날그날 들어오는 기본 물량이 있는데, 오전·오후조가 공동으로 근무하는 시간대가 1시간 줄어들었다. 과거엔 3시간을 두 사람이 같이 진열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2시간 동안만 같이 진열할 수 있다. 현장 관리자들이 대놓고 ‘여사님, 이제 커피 마시러 갈 시간 없습니다’라고 한다”고 말했다. 이마트 사측은 “회사는 봉사단체가 아니다. 노동시간이 줄어든 만큼 중간에 쉬는 시간도 어느 정도 줄여서 압축적으로 일하라는 것이다. 업무 자체를 줄여 효율적으로 시스템을 바꿔나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신세계그룹의 노동시간 단축 계획이 발표된 직후 노동계 내부에서도 시선이 갈렸다. 민주노총이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꼼수와 노동강도 강화를 우려한 반면, 한국노총은 “진일보한 시도”(김주영 위원장)라고 평가했다. 민주노총의 이런 우려에 관해 한 민주노총 활동가는 “노동시간 단축 법 개정이 논의 중인 지금, 임금 하락을 이유로 노동시간 단축에 반대해버리면 경영계가 이용한다. 노동운동이 그간 생활임금을 외치면서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삶의 질 개선은 깊이 고민하지 못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조성재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연구본부장은 “노동자들의 임금이 보전되는 방식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한 것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다만 적은 노동시간으로 생계비를 충당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도 있다. 미국의 웨그먼스 푸드마켓 등 몇몇 유통업체는 노동자들이 고임금을 받으며 고품질 서비스를 고객에게 제공한다. 일하는 방식을 혁신해 노동자가 생산하는 부가가치를 높여 임금을 올릴 수 있는 여력을 노사가 같이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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