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에서
시에는 무슨 근사한 얘기가 있다고 믿는/ 낡은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시에는/ 아무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생밖에.// (중략)
확실하지 않음이나 사랑하는 게 어떤가./ 시에는 아무것도 없다. 시에는/ 남아 있는 우리의 생밖에./ 남아 있는 우리의 생은 우리와 늘 만난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오규원 시인)


서울 용산구 해방촌에서 ‘고요서사’라는 이름의 문학 서점을 운영한 지 햇수로 3년. 세월호 참사나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작은 행사나 이벤트는 했지만 정작 용산 참사의 아픔을 챙긴 적은 없었다. 이 사실을 약 열흘 전 잠자리에서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용산에 있는 서점으로서 무언가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사IN 조남진용산 참사를 기리는 기획전 〈상기전〉을 연 문학 서점 ‘고요서사’.
쉽진 않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벌려놓은 일들을 수습하면서 잘 준비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용산 참사에 대해 이렇다 할 관심을 표하지 않고 살아온 내가 이런 기획전을 해도 될까 싶은 자책감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게다가 서점은 엄연한 상업 공간이므로 정치나 사회적 이슈 앞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보수 정권에서 보낸 10년은 결코 짧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검열은 이상한 습관처럼 나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계속 망설이면서도 일단은 자료 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오규원 시인의 ‘용산에서’라는 시를 발견했다. 사실 이 시는 제목에 ‘용산’이 들어갔을 뿐 용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봐도 된다. 하지만 “시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외침, “남아 있는 우리의 생은 우리와 늘 만난다”라는 고요한 절규가 마음을 움직였다.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라는 시집의 문을 여는 이 시가 문학기획전 〈상기전〉을 꾸리는 데 큰 힘을 주었다. 용산을 외면하지 않은 문학을 나도 외치고 싶었다.

〈상기전〉은 용산 참사를 모티프로 삼았거나 떠올리게 하는 소설 여섯 편을 주요 도서로 정했고, 용산 혹은 재개발에 관한 산문, 시집, 독립 문예지를 관련 도서로 묶었다. 서점 SNS에는 제목을 공개하지 않은 ‘히든 북(hidden book)’ 두 권을 오프라인 서점에 함께 진열했다. 기획전의 이름인 ‘상기전’은 용산 참사를 ‘돌이켜 생각’하자는 뜻인데, 사전의 몇 가지 다른 의미도 맞춤했다. ‘어떤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본문 위나 앞쪽에 적는 일. 또는 그런 기록’ 그리고 ‘상복을 입는 기간’이라는 뜻이 같이 들어 있다. 전시 목록은 다음과 같다. 그중 일부를 소개한다.


- 용산 참사가 모티프이거나 떠오르게 하는 책 (전부 픽션)

황정은, 〈파씨의 입문〉 중 ‘옹기전’/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중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손아람, 〈소수의견〉/ 김성희 외, 〈내가 살던 용산〉/ 황정은, 〈백의 그림자〉/ 정찬, ‘새의 시선’

- 용산 혹은 재개발에 대한 책(산문·시집·독립 문예지)

이광호,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황인숙,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젤리와 만년필〉 2호


■ 황정은, 〈파씨의 입문〉 중 ‘옹기전’

우연히 주운 항아리의 말에 이끌려 서쪽으로 향하는 아이의 이야기다. “서쪽에 다섯 개가 있어”라는 말이 용산 참사에 희생당한 다섯 명을 뜻한다는 추측이 있다. 작가는 ‘용산 같은 것들’을 떠올리며 잊지 않기 위해 썼다고 한다.

‘옹기전’은 황정은 작가의 두 번째 단편소설집 〈파씨의 입문〉 수록작이다. 작가는 이 작품이 직접 ‘용산’을 모티프로 한 것은 아니지만, 용산처럼 참사가 벌어진 뒤 잊히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것은 맞다고 웹진 문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무관심·기만·은폐로 인한 ‘망각’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같은 말(“서쪽에 다섯 개가 있어”)을 반복하는 항아리와 순진한 어린아이의 고집스러움이 기묘한 긴장감을 전달한다.


■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중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서른 살 생일, 남산에서 마주친 옛 애인. 택시기사가 된 뒤 서울 곳곳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해온 그는 불타는 망루도 방송했다. ‘나’는 호기심에 튼 방송에서 참사를 목격했다. 재회한 연인이 자신들의 추억과 용산의 기억을 교차시키는 밤의 이야기다.

나는 20대 후반의 생일에 용산구에 있는 작은 산에 오르면서 이 책을 들고 갔다. 산 중턱에 올랐을 때 펼친 소설에서 몇 가지 우연이 겹쳐 신기했고, 그 내용 때문인지 읽고 난 다음에도 선명하게 남는 소설이었다. 개인과 사회의 기억을 교차시켜서 타인의 일을 자신의 일로 체화할 수 있게 만드는 건 김연수 작가 소설의 큰 매력 같다. 여러모로 용기 있는 소설이라 생각한다.


■ 김성희 외, 〈내가 살던 용산〉

용산 참사 1주기에 맞춰 나온 책. 자칫 무겁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용산의 이야기를 만화로 풀어내 이해를 돕는다. 희생자들의 유가족과 철거민들을 취재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해 사실에 기반을 둔 이야기로 구성했다. 용산 사람들의 육성이 잘 담겨 있다.

만화이기 때문에 철거민들의 삶과 용산 현장을 시각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개별 인물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어서 “여기, 사람이 있다”라는 말의 의미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만화가 꼭 어린아이를 위한 것은 아니지만 청소년 자녀가 있다면 용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권해도 좋겠다.


■ 정찬, ‘새의 시선’

알 수 없는 이유로 근육에 문제가 생겨 촬영을 할 수 없게 된 사진작가 박민우. 그의 치료를 맡은 정신과 의사는 그가 채증을 위해 용산 철거 현장, 불타는 망루 안에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된다. 고통스러운 기억과 수치심이 덮친 인간에 대해 묵직하게 다룬다. 용산 참사를 직접 경험한 사람의 트라우마를 과거의 대학생 ‘분신’ 사건과 연결 지어 말하는 단편소설. 제42회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작가 한강은 용산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고는 “저건 광주잖아”라고 불쑥 중얼거렸다고 〈소년이 온다〉 에필로그에 썼다. 광주와 용산과 팽목항에서 되풀이되는 것들 곁에 문학은 늘 서성여왔다. 앞서 ‘히든 북’이 두 권이라고 했는데 그중 하나는 역시 먼저 인용한 오규원의 시집이고, 다른 하나는 용산이든 어디든 소외된 현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송경동 시인의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이다. 〈상기전〉은 그의 시로 닫을 예정이다.

무허가

용산4가 철거민 참사 현장/ 점거해 들어온 빈집 구석에서 시를 쓴다/ 생각해보니 작년엔 가리봉동 기륭전자 앞/ 노상 컨테이너에서 무단으로 살았다/ (중략) 허가받을 수 없는 인생/ 그런 내 삶처럼/ 내 시도 영영 무허가였으면 좋겠다/ 누구나 들어와 살 수 있는/
이 세상 전체가/ 무허가였으면 좋겠다
(송경동 시인)

기자명 차경희 (해방촌 문학 서점 ‘고요서사’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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