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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하고 깊게 음표를 밀고 간다

2018년 02월 02일(금) 제541호
이기용 (허클베리핀 리더)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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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차 밴드 허클베리핀은 평단의 고른 지지를 받아왔다. 리더 이기용씨가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한 뮤지션을 소개한다. 첫 회 주인공은 ‘모던록의 대부’라 불리는 싱어송라이터 이승열씨다.

허클베리핀 이기용이 만난 뮤지션 ➀ - 이승열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음악가도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서 투쟁하고 좌절한다. 고고하게 위에서 음표들을 내려다보는 듯 보여도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넘어지기 일쑤다. 성공할 때보다 실패하거나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훨씬 길다. 음악 3~4분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은 대형 어선이 아닌, 흡사 노인이 타고 가는 쪽배와 같다. 아무것도 건진 것 없이 돌아오는 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노래를 만들고 가사를 붙이면서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 확장해가고 있는 이 시대의 뛰어난 뮤지션들. 그들을 만나 어떻게 음악이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첫 번째 뮤지션은 현재 대중음악계에서 중요한 싱어송라이터로서 20년 이상 활동하고 있는 이승열씨다. 이승열씨를 처음 만난 날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뮤지션으로서 그를 각인하게 된 순간은 정확히 기억한다. 그날은 태풍 볼라벤이 초속 40m가 넘는 속도로 제주로 다가오기 이틀 전인 2012년 한여름 어느 날이었다. 한 포털 사이트에서 시상식을 겸한 공연을 제주에서 개최했다. 내가 속해 있는 밴드 허클베리핀도 제주로 갔다. 당일 무대 뒤에서 리허설 차례를 기다리며 기타를 만지작거리다가 순간, 멈칫했다. 수없이 들어 익숙해진 문법의 음악이 아닌 뭔가 이국적이고 주술적인 멜로디가 내 귀를 사로잡았다. 출연진 대부분은 관객을 열광적으로 들끓게 할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밴드였지만 나는 뜻밖의 몽환적인 음악이 가진 강력한 주술성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가 바로 이승열씨다. 그는 그 자신이 해오던 모던록의 문법에서 벗어나 미지의 영역으로 항해를 막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그때 제주 공연 이후 나는 얼마 있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로 옮겨갔다. 최근에야 다시 새 음반 작업을 위해 서울로 돌아왔다. 그와 6년 만에 만나 음악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시사IN 윤무영
이기용씨(왼쪽)는 2012년 여름, 제주의 한 공연장에서 만난 ‘뮤지션’ 이승열씨(오른쪽)를 기억한다. 당시 이승열씨는 미지의 영역으로 항해하듯 기타를 연주했다.


이기용:
2017년 6번째 정규 앨범 <요새드림요새>를 발표하고 시간이 좀 흘렀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

이승열:음악 작업뿐만 아니라 <승열과 케일린의 영미문학관>이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했다. 최근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도 읽었다. 종종 소설 속 배역을 목소리로 연기하기도 한다. 점잖은 영국 신사 역할도 재밌지만 바람둥이 역을 한다든가 전혀 예상치 못한 즉흥적인 코믹 연기도 하고.


이기용:
목소리 연기에 재능이 있다는 건 언제 알게 되었나?(웃음)

이승열:몇 년 전에 영미 고전문학을 소개하는 <영미문학관>이라는 EBS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처음에 방송 작가가 말하더라. ‘영어와 한글이 섞인 대본에 간혹 연기가 있을 수 있다’고. 예를 들면 장발장 역인데, 프랑스 사람이 영어를 한다면 이런 특징이 있지 않을까 해서 녹음할 때 한번 해봤다.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웃음).


이기용:
제작진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승열:잘한다고 하고 재미있다는 얘기를 자꾸 듣다 보니 계속하게 된 거다. <영미문학관>을 직업적으로 했던 것은 당시 주요 수입원이기도 했지만 가사를 쓸 때 방송에서 읽었던 어떤 문구가 도움이 되기도 해서다. 특히 3집과 4집을 만들 때는 그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어릴 적 꿈이 글을 쓰는 거였기도 했다. 기자나 소설가 같은.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이승열 제공
이승열씨의 앨범은 2011년 4집 앨범 부터 이전과는 다른 색채를 띤다.


이기용:
음악을 듣다 보면 2011년 4집 앨범 <V>부터 이전과는 다른 세계로 들어갔다는 느낌이 든다. 굉장히 실험적인 음악이라 3집까지의 팬들한테는 좀 당황스러운 면이 있었을 거 같다.

이승열:실제로 그런 팬들도 있었다. 뭐 어쩔 수 있나. 그 앨범을 작업할 때는 여러 곡의 아이디어들이 동시에 떠올라서 한 번에 여러 곡을 같이 작업하기도 했을 만큼 아이디어가 많았다. 그 작업을 끝내고 나서 자신감도 좀 생겼다. 전보다 정말로 한 단계 차원이 높아졌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그 이후에 그에 준할 만한 또 다른 결과물이 나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대중적인 멜로디는 신이 주는 선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람이 친화적이어야 음악도 그럴 수 있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사실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는 것 같다. 하긴 미국 뮤지션 프린스처럼
괴기스럽고 괴짜인 사람도 음악으로 사람들을 흡수해버리는 경우도 있으니… 여전히 미스터리다. 짧게 말하면, ‘나는 대중적인 멜로디감이 없는 것 같다’(웃음).


이기용: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내내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외삼촌이 기타를 선물해주었다. 기타를 처음 만져보면서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되는 걸 느꼈고 그러면서 점점 기타에 빠져들었다. 음악 세계로 들어가게 된 계기가 있었나?

이승열:어릴 때 피아노에 더 관심이 있었다. 기타를 좋아하게 된 건 미국에 간 뒤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가 ‘메탈키드’ 였는데 그 친구가 자기 집에서 일렉트릭 기타로 천둥소리를 내는 거다. 너무 신기했다. 내게는 어머니가 사준 나일론 기타가 있었지만 그걸로는 친구랑 상대가 안 됐다. 그러다가 우연히 오지 오스본의 ‘D’라는 노래를 듣고 내가 먼저 카피하게 됐다. 그 곡은 나일론 기타로 연주할 수 있는 노래였고 게다가 당시로서는 카피하기 어려운 곡이었다. 그 이후로 그 친구가 내 밑으로 들어오게 됐다(웃음). 그러면서 취향을 찾아가게 되었다. 유투(U2)나 더 큐어, 더 스미스 같은 영국 음악도 듣고 블루스도 듣고. ‘밥은 굶어도 CD는 산다’가 그때 모토였다.

ⓒ이승열 제공
이승열씨(오른쪽)의 6번째 앨범 <요새드림요새>는 애플뮤직과 바이닐에서만 들을 수 있다.


이기용:
요즘 많은 뮤지션이 여러 이유로 홈 리코딩 방식의 녹음을 한다. 이승열씨도 최근 앨범 두 장을 홈 리코딩으로 작업했다. 여러 사람과 공동 작업을 해야 하는 록 음악가로서 최근의 작업 방식에 대해 듣고 싶다.

이승열:나는 혼자 일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 요즘엔 가상 악기들이 충분히 잘 나와 있으니 나는 곡을 시뮬레이션해서 설계도를 만드는 ‘데모 작업’을 하는 거다. 역량이 뛰어난 연주자들이 데모를 듣고 잘 구현해주니까. 이젠 그런 상황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그렇게 음반 녹음의 많은 부분을 혼자 하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 여러 사람으로 구성된 밴드 안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상황이나 창작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는 상황이 싫었던 것도 이유가 되었다. 방준석씨와 함께 ‘유앤미블루’로 활동할 시절에도 작업을 따로 했다. 한 사람이 작업을 하면 다른 한 사람이 바통을 받아서 작업하는 방식으로.


이기용:
중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 걸로 안다. 이민을 간다는 건 내가 속한 환경 전체가 바뀐다는 것인데…. 한대수 선생도 미국에서 몇 달 동안 사람과 말을 안 하고 지내서 혼잣말 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하더라. 그런 소외감이나 고독감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승열: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혼잣말을 하기 시작한 건 걸어 다니면서 영어 표현을 연습하면서부터다. 미국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발악을 할 때였다. 내가 이민을 갔던 게 열네다섯 살 때다. 사춘기였으니까 언어가 바뀐 게 가장 충격이었던 것 같다. 일상 언어나 문화 같은 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도 않고, 친구를 사귀거나 부딪치면서 알게 되지 않나. 그래서 나는 이어폰을 끼고 홀로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음악에 빠르게 빠져들었던 것 같다.


이기용:
최근 영미 문화권의 음악들에 대해 흥미가 많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요즘 EBS에서 <세계음악기행>을 진행하고 있기도 하고. 어떤 음악에 흥미를 느끼나?

이승열:요즘은 1920년대 집시 재즈, 스윙, 장고 라인하르트 같은 모노 녹음 시절의 원초적인 소리가 좋다. 그때처럼 모노 리코딩 음악도 해보고 싶다. 모든 음악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겠지만, 1940∼1950년대 튜브라디오에서 나오던 그런 느낌 말이다.

이기용:최근 앨범 <요새드림요새>에서 유통 방식을 바꿨다. 주요 포털이나 음원 사이트에서 유통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모바일 앨범 플랫폼 애플뮤직과 바이닐에서만 한정적으로 자신의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했다. 그 두 곳이 음악가들에게 수익을 배분하는 방식이 비교적 합리적인데, 음원 유통 방식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나?


이승열:애초에 내 통제하에서 어떤 결과가 도출될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나는 가려운 곳을 긁는 심정이었고, 그래도 유통의 이상한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주위에서는 디스코그래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포털 사이트에서 이번 앨범만 볼 수 없는 게 ‘뭔가 이가 빠진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다. 나도 공감한다. 하지만 뮤지션에게도 이익이 돌아가는 합리적인 유통 방식을 찾을 수 없을까 하는 문제의식은 계속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줄타기하는 사람인 것 같다.


이승열씨의 음악을 짧은 말로 표현하면 ‘생각하게 하는’ ‘지긋이 바라보는’ ‘깊은’과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그와 인터뷰를 끝낸 후에는 ‘집요함’이라는 단어가 추가되었다.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안에
감추고 있는 그의 그런 집요함이 매번 앨범에서 자신의 영역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됨을 느꼈다. “나는 아이가 없고 아내도 일을 하기 때문에 간섭 없이 시간을 쓸 수가 있어. 그래서 나는 집에서 하는 작업에 열렬히 매진했던 것 같아. 직장 나가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이 ‘앨범을 왜 이렇게 오랜만에 냈냐’고 물어보면 사실 속마음으로는 ‘그동안 곡을 얼마나 많이 썼는지 아십니까’ 하고 되물을 때가 많아.” 인터뷰가 끝난 뒤 그가 들려준 이야기에 크게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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