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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이야기꾼들

2018년 02월 08일(목) 제542호
심보선 (시인·경희사이버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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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언제까지 과거에 집착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답할 것이다. 계속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정권교체와 무관하게, 판결이나 사면과 무관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대학 시절 우연히 텔레비전을 시청하다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방송의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국회에서 진행 중이던 5공 비리 및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청문회에 국민의 눈과 귀가 쏠리던 1989년 연말의 어느 날이었다. KBS에서 심야 영화 한 편이 방송되었다.

1973년 칠레 쿠데타를 다룬 영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이하 <산티아고>)이다. 육군참모총장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한 군부세력은 전차와 전투기를 동원해 대통령궁을 공격했고 대통령 아옌데는 저항 끝에 목숨을 잃었다. 쿠데타가 발발한 지 2년 만에 제작된 영화는 지극히 사실주의적인 접근법을 취했는데, 이 때문에 사건의 비극성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토록 ‘좌파적인’ 영화를 누가 어떤 이유로 방영키로 한 것일까? 마침 1989년 12월 칠레는 반군부 세력인 ‘민주화를 위한 정당 협력체’가 국민투표로 군부를 종식시키고 대선에서 승리를 거뒀다. 한국 역시 군사정권의 적폐 청산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방송 민주화 운동도 시작되었다. 1987년에는 MBC가, 1988년에는 KBS가 노조를 결성했다. 일회적 에피소드로 보이는 <산티아고>의 방영은 이 모든 상황이 결합하여 나타난 결과물일 수 있다. 하지만 내게는 <산티아고>의 방영 자체가 방송 민주화의 신호로, 아직 하지 못한 말, 앞으로 해야 할 말이 태산만큼 남아 있음을 국민에게 알리는 메시지로 읽혔다.

최근 방송의 변화 또한 구정권의 적폐를 청산하고 반민주적 조직 문화를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과 맞물려 있다. 이는 촛불과 탄핵이 직접적 원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뿌리는 19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부패한 대통령을 권좌에서 내몬 헌법재판소라는 제도는 1987년 민주화운동의 산물이었다. 지난 정권의 핍박하에서 진실을 추구해온 언론인들은 방송 민주화라는 역사가 없었다면 자신의 역할과 정체성을 자리매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인식하지 못한다. 역사가 얼마나 반복되는지, 적폐 청산과 진상 규명이라는 동일 주제가 얼마나 자주 등장했는지, 인류 역사에서 유사한 비극과 투쟁이 얼마나 빈번히 벌어졌는지. <산티아고>, 영화 <1987> 그리고 <1987> 안에 나오는 ‘광주 비디오’는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역사는 승리의 추억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 망각되었는지를 밝힌다는 것을.

나는 <1987>을 본 뒤 과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1989년의 <산티아고> 방영이 문득 떠오른 것도 바로 그러한 생각의 와중에서였다. 그러나 생각은 먼 과거에만 머물지 않았다. 불과 몇 년 전에 일어난 사건조차 우리는 망각해버린다. 유사한 사건이 다시 일어나면 우리는 비로소 분노하고 책임을 묻는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종종 생각한다. ‘저들이 망각했다. 우리가 아니라.’ 과연 그럴까?

패배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끔찍하도록 평화로운 지옥

용산 참사가 일어난 지 9년이 됐다. 보상 합의가 있었고 특별 사면이 있었다. 그 정도면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고, 그만하면 억울함도 덜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뒤집는 영화가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공동정범>이라는 영화다. 영화는 감독의 전작 <두 개의 문>에서 못다 한 이야기, 용산 참사 당시 망루에 올랐다가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상처투성이의 현재를 다룬다고 한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진실, 혹은 이미 알려진 과거 속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불편하게 캐묻는 이야기꾼들이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과거에 집착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답할 것이다. 계속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정권교체와 무관하게, 판결이나 사면과 무관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답할 것이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안도하는 순간, 망각은 거스를 수 없는 물리법칙처럼 작동하여 우리가 그토록 싸웠던 무책임과 무자비함을 어느새 승자의 위치에 되돌려놓기 때문이다. 기억의 힘을 잃은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또다시 패배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끔찍하도록 평화로운 지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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