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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보다 더 무서운 건 4·3을 잊는 것이다”

2018년 02월 07일(수) 제542호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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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출신 현기영 소설가는 1978년 <창작과 비평>에 제주 4·3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순이 삼촌>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그는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1947년 3월1일 오후 2시45분께 제주읍 관덕정 앞에서 총성이 울렸다. 경찰의 총탄에 맞아 6명이 사망했다. 이 총격 사건 이후 제주는 혼란에 빠졌다. 이에 저항하는 제주도민을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탄압했다. 1948년 4월3일 5·10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남로당 제주도당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1954년 9월21일까지 7년7개월 동안 4·3사건으로 제주도민 2만5000~3만명 정도가 희생당했다. 과거 군사정권은 4·3사건에 대한 논의 자체를 철저히 금기시했다. 4·3사건의 진실 일부가 처음으로 알려진 계기는 제주 출신 현기영 소설가가 1978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순이 삼촌>이었다. 소설은 1949년 1월17일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주민 400여 명이 토벌대에게 학살당한 이른바 ‘북촌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제주 4·3사건 70주년을 맞아 현기영 작가를 만났다.



ⓒ시사IN 이명익
현기영 소설가는 “모든 국민이 연민의 감성과 공감의 감정으로 4·3을 기억해주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70주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를 듯하다.


소설 <순이 삼촌>을 펴낸 지 40년이 흘렀다. 4·3이 난 지 30년 만인 1978년 소설을 통해 처음으로 ‘금기’에 도전한 셈인데 그로 인해 탄압을 받았다. 1987년 6월항쟁이 일어나고 조금씩 4·3에 말문이 트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가까스로 어둠 속에서 나왔다. 4·3은 단순히 제주도에 국한될 수 없는 사건이다.

제주를 넘어서는 전국적 사건으로 보는 이유는?


가해자가 중앙 세력이고 육지에서 왔다. 결코 제주도만의 문제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과거 군사정부는 4·3을 제주도에만 가둬두려 했다. 제주도민들이 무슨 풍토병에 걸린 것처럼 터부시하고 도외시했다. 이제 70주년을 맞아 전국화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를 향해 발언하고 조명해야 한다.

<순이 삼촌>을 쓴 계기는?


4·3으로 외가 쪽이 풍비박산이 났다. 중학생 때부터 4·3에 대해 말을 해야 한다는 게 내 삶의 명제였다. 4·3의 처참한 상처를 보고 자라면서 실어증이랄까 말더듬이가 됐다. 말을 더듬으니 대신 글을 썼다. 내게 글쓰기는 자유이고 해방이었다. 성인이 되면서 말 더듬는 게 좀 고쳐졌다. 사실은 술이 고쳤다고 해야지. 술을 마시면 좀 풀리더라. 그래도 그 트라우마는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진다. 내면의 억압이 콱 뭉치면 지금도 말을 심하게 더듬곤 한다.

ⓒ연합뉴스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왼쪽)은 4·3사건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처음 사과했다.
처음에는 순수문학을 추구했다는데?


등단 초기에는 언어의 아름다움, 형식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순수문학을 하려 했다. 하지만 4·3은 온 섬을 할퀸 대참사라서 늘 내 무의식과 잠재의식 속에 자리했던 것 같다. 첫 소설 <아버지>라는 작품이 형식이나 미학을 추구했지만 그 배경에는 4·3이 있었다. 문단에 데뷔하고 나니까 내면의 억압이 있더라. 문학이라는 건 자기해방인데, 내면의 억압, 유년의 어두움이 주는 억압, 이건 나만의 억압이 아니라 4·3을 거치며 살아남은 모든 이들의 내면의 억압이기도 했다. 소설가로서 공인된 ‘펜대’를 쥐었으니 이제 4·3 얘기를 하지 않고서는 단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는 그런 압박감에 시달렸다. 4·3을 담은 소설 세 편 정도만 쓰고 난 뒤 하고 싶은 문학을 하려 했는데 결국 그렇게 안 됐다.

특별히 북촌 사건을 주목한 이유는?


나는 노형리라는 농촌에서 나고 자랐는데 그 마을도 4·3으로 560여 명이 희생됐다. 북촌리 얘기를 쓴 까닭은 노형 마을은 4·3 전 기간에 희생된 데 비해 북촌은 하루 이틀 만에 400명 이상이 학살당했다. 북촌을 무대로 선택했는데 소설엔 노형리 경험도 섞여 있다. 그래서 소설에 등장하는 서촌 마을은 노형과 북촌 마을 모두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내 음력 생일이 북촌 학살사건 날짜와 같더라. 북촌 마을 어른 중에 토정비결과 사주를 잘 보는 분을 만났더니 “당신 사주는 운명적으로 4·3을 쓰게 되겠다”라고 하더라. 그래서 그런 건지 결국 <순이 삼촌>을 쓰게 됐다(웃음).

‘금기’를 깬 소설이라 발표 뒤 고초를 겪었는데.

1978년 <순이 삼촌>을 발표하자 서울에 있던 제주 출신들이 모여서 친목모임을 만들었다. 소설을 읽은 젊은 지식인들, 주로 재경 학생이었는데 학생운동을 하다 감옥에 갔다 온 후배도 있고 앞으로 감옥 갈 준비가 돼 있는 친구들(웃음)이 모였다. 모임 1년쯤 될 때인 1979년 11월 <순이 삼촌>이 단행본으로 나왔다. 공교롭게도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10·26 사건 직후였다. 11월24일, 마침 제주 친목모임 날이었는데 그날 서울 명동 YWCA회관에서 결혼식을 위장해 재야 세력들이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에 참석하고 만나자고 했다. 대학생 중 하나가 붙잡혔는데 내 소설책을 들고 있었다. 누구랑 왔냐고 물어 현기영 소설가와 왔다고 대답해서, 며칠 뒤 학교 수업을 하다가 잡혀갔다.

무슨 혐의였나?

경찰이 나를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인계했다. 요원들은 왜 이런 불순한 책을 썼냐며 고문을 했다. 계속 왜 썼냐고 추궁하며 고문하는 바람에 앓는 소리로 비극적인 참사를 그대로 두면 역사에서 다시 되풀이되지 않겠느냐, 뭐 이런 식으로 어렵사리 답변했다. 그들은 더 이상 4·3 관련 글은 쓰지 말라고 했다. 실제 고문을 당한 뒤 1년 동안 절필하기도 했다. 당시의 고문이 가져다준 고통과 후유증을 <위기의 사내>(1988)라는 소설에 담았다.

전두환 신군부 시절인데 사상적으로도 문제를 삼았나?

<순이 삼촌>을 읽어보면 ‘공비’라는 단어가 나온다. 공비 소행에 대해서는 별로 안 쓰고 군인과 경찰의 만행을 집중적으로 묘사했는데 처음에는 나를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려다 결국 못했다. 신군부가 나를 국가보안법으로 집어넣으면 재판을 해야 하는데 그 법정에서 4·3에 대한 논쟁이 붙게 되니까 그렇게는 하지 못했다. 한 달 구류를 살리고 풀어줬다.

그 뒤 <순이 삼촌>은 금서가 됐는데?

풀려나 집에 와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날 고문했던 보안사 고문 기술자가 대뜸 “<순이 삼촌>은 어떻게 됐어?”라고 윽박지르듯 물었다. 내가 “아 그거 재판에 들어갔죠”라고 답했더니, 그가 “어어, 그게 아닌데, 우린 재판 안 걸기로 했는데…”라며 당황스러워했다. 초판이 다 나가서 다시 찍었다는 뜻으로 재판에 들어갔다(2쇄를 인쇄했다는 의미)고 얘기했는데, 책이 팔리니까 그게 또 문제가 되었다. 이번에는 경찰에 붙들려가서 일주일 밤샘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결국 소설책은 판매금지처분을 받았다. 그게 1980년 8월이었다.

4·3 유족들은 어떻게 지냈나?


북촌리 마을에 이른바 ‘아이고 사건’이란 게 있다. 1954년 1월 주민들이 육지에 나가 객사한 마을 청년들의 상여를 메고 길놀이를 했는데 북촌국민학교(북촌초등학교) 출신이니까 교정을 들렀다. 그곳이 학살 현장이었다. 그때 설움에 북받친 주민들이 “아이고 아이고” 하며 울었다. “빨갱이가 죽었는데 왜 우냐”며 경찰이 울었던 마을 사람들을 조사했다. 그땐 4·3 유족들은 울어서도 안 되는 거였다. 혈육의 죽음을 애도도 못하게 하는 처참한 나라였다.

북촌 학살 사건의 가해 책임자는 밝혀졌나?


인근에 주둔하던 2연대 3대대가 학살했다. 대대장이 남녀노소 주민을 북촌국민학교에 모아놓고 현장 발포 명령을 내렸지만 과연 대대장 독단으로 내렸겠나. 대대장도 그 위에 연대장으로부터 허가받지 않고는 학살할 수 없다.

4·3사건이 일어난 때는 미군정기인데?


4·3 책임에서 미국도 자유로울 수 없다. 4·3의 시발점이 된 1947년 제주시 관덕정 3·1절 발포사건은 미군정 경찰이 일으켰다. 4·3 전 과정에서 진압부대 이동 등 작전권을 미군이 가지고 있었다. 또 미군 군사고문단이 4·3 탄압의 배후에 있었다는 사실은 기록으로 남아 있고, 증언자들의 증언도 채록돼 있다.

가해자들이 지금까지 사과한 적 있나?


김대중 정권 때 2000년 4·3 관련 특별법을 마련한 뒤 조사를 거쳐 불완전하나마 진상규명 백서(제주4·3위원회 백서-화해와 상생)가 나왔다. 이를 바탕으로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처음 사과를 했다. 노무현 정부가 사과했다고 해서 이승만 정부나 가해자가 사과한 건 아니다. 또 노 전 대통령의 사과에 대해 국방부가 나중에 반기를 들려다 설득력이 약해 들어갔다는 말도 있었다.

제주도 내 보수 세력은 4·3사건을 어떻게 보나?

경우회(정식 명칭은 대한민국재향경우회. 퇴직 경찰관들의 법정단체)가 4·3평화재단에 협력을 한다. 4·3평화재단 이사진 중에 경우회 인사가 들어와 있다. 처음에 피해자 쪽에서 반대했지만 제주도는 공동체 문화가 특징이다. 가해자 편에 섰더라도, 악랄한 자만 빼면 어쩔 수 없이 가담한 이들은 같은 피해자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입장에서 손을 잡고 함께하고 있다. 공동체적으로 회복해보자는 의미가 있다.

4·3사건의 정확한 명칭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


4·3은 중의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쓰면 다른 하나가 의미를 잃는다. 항쟁과 수난, 동전의 양면과 같다. 우선 항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아직도 분단국가인데 모든 사회적 문제, 일상에 미치는 악영향이 분단에서 오는 게 얼마나 많은가. 처음에 나라를 세우려면 분단된 나라가 아니라 하나가 된, 통일된 나라를 세우는 게 옳지 않으냐. 이것이 4·3 봉기의 대의였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에 이렇게 오게 된 거 아니겠나. 항쟁에는 무지막지한 탄압에 대한 어쩔 수 없이 강요된 저항이 결합된 거였다. 여러 가지 다의적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냥 4·3이라고만 불렀으면 좋겠다.

4·3 70주년을 맞아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 만행 장소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기념비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고 하더라.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인류가 그 사실을 잊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4·3을 대입해서 읽고 싶다. ‘3만명 내지 5만명이 죽었다는 대참사, 이것보다 더 무서운 건 국민들이 4·3을 잊는 것이다.’ 우리가 자꾸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려는 건 이 같은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닌가. 이 문제를 직시하고 껴안으려 하지 않고 이제 그만하자는 식으로 외면하면 그 참사는 다시 되풀이된다. 그래서 모든 국민이 연민의 감성과 공감의 감정으로 4·3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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