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초반, 미국의 농학자 조지 워싱턴 카버 박사는 땅콩으로 300가지가 넘는 발명품을 만들었다. 현재까지 ‘땅콩 박사’로 불린다. 전부 상용화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땅콩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들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인기 있는 땅콩버터는 조지 워싱턴 카버 박사의 발명품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땅콩버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884년 마셀러스 길모어 에드슨이라는 캐나다인이 볶은 땅콩을 으깨 만든 땅콩 반죽에 대한 특허다. 1895년에는 콘플레이크 발명가인 존 하비 켈로그 박사가 땅콩버터 제조 과정에 대한 특허를 미국에서 등록했다.

탄생사의 절반을 다른 나라에 의지하고 있는 이 음식을 미국인들은 왜 이토록 사랑할까. 땅콩과 관련한 미국의 역사는 그리 유쾌하지 않다. 미국의 백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쓰기 위해 납치해올 때 땅콩을 흑인들의 식량으로 썼다. 흑인들은 미국에 도착해서도 끼니의 대부분을 땅콩으로 해결해야 했다. 뒤늦게 백인들이 관심을 보이고 술안주 등으로 가공해서 먹었다.

땅콩은 목화 재배로 황폐화된 농경지를 살리기 위해 심어졌고, 미국 남부를 대표하는 작물 중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매년 쏟아져 나오는 땅콩을 어떻게 할지 골머리를 앓던 중이었으니 땅콩버터 상품화는 자연스러운 순서였을 것이다.

ⓒ이우일 그림

미국인들에게 땅콩버터는 우리의 라면과 같은 음식이다. 간단히 끼니를 때우기에 땅콩버터만 한 게 없다. 〈조 블랙의 사랑〉(1998)에서 브래드 피트가 처음 땅콩버터를 한 숟갈 맛보고 황홀해했던 것처럼, 엘비스 프레슬리가 ‘땅콩버터 바나나 샌드위치’를 밥처럼 먹어댔던 것처럼 미국인에게 땅콩버터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을 제외한 미국인들은 집뿐 아니라 학교나 동네 식당에서 땅콩버터를 흔히 접한다.

땅콩버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땅콩버터 젤리 샌드위치(빵의 한쪽 조각에는 땅콩버터를 바르고 다른 조각에는 잼 또는 젤리를 발라서 두 개를 겹쳐 먹도록 함)’라는 음식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아이들이 보는 미국산 만화에도, 청소년 텔레비전 시리즈나 영화에도 땅콩버터 젤리 샌드위치가 흔히 나온다.

미국인들은 ‘땅콩버터의 날’까지 만들어가면서 땅콩버터를 특별히 기념한다. 아마도 흑인들의 지역 음식에서 시작된 향토성과, 흑인 박사가 땅콩 농업을 살리기 위해 평생 헌신하고 명예와 부를 남들과 나누려 했다는 청교도적인 이미지가 시너지를 일으켜서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이것저것 다 떠나 넓은 땅에서 기르기 쉽고, 가공이 용이하며, 취향을 많이 타지 않는 음식이 땅콩이기도 하다.

좀 더 먹을 핑계를 만들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한국에서 땅콩버터는 과일 잼에 비해 소수 취향이다. 이마저도 ‘누텔라’라는 신흥 강자에게 밀린다. 요리에 넣는다고 해도, 편의를 위해 콩국수에 첨가하거나 중식당에서 탄탄면에 넣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도 이 글을 보는 사람 중에 누군가는 땅콩버터 한 통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입이 심심할 때마다 한 숟가락씩 먹고 있을 거라 믿는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땅콩버터를 좋아하는 이들을 위해 미국은 ‘땅콩버터의 날’ (1월24일) 외에도 ‘땅콩버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날’(3월1일), ‘땅콩버터와 젤리의 날’(4월2일), ‘땅콩버터 쿠키의 날’(6월12일), ‘땅콩의 날’(9월13일), ‘땅콩버터 퍼지의 날’(11월20일)도 기념일로 정해두었다.

재미있게도 이 기념일들의 유래는 모두 불분명하다. 어쩌면 땅콩버터를 너무 사랑해서 어떻게든 좀 더 먹을 핑계를 만들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복잡하게 요리할 필요 없이 뚜껑을 열어 한 숟가락 먹기만 해도 당신의 입맛과 열량을 책임져주는 이 땅콩버터를 위한 날을, 한 번쯤은 기념해도 좋지 않을까.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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