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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이에게 머리 떼어주는 영웅

2018년 02월 08일(목) 제543호
중림로 새우젓 (팀명)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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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나타나 정의의 편에 서주길 바라는 마음은 인류 공통인 걸까. 수많은 영웅 가운데서도 일본 애니메이션 주인공 ‘호빵맨’은 좀 특별하다. 근육질 몸매와는 동떨어진 3등신 체형에 펀치를 빼면 내세울 무기도 없다. 오히려 자신의 머리인 단팥빵을 떼어주고 나면 힘이 줄어든다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호빵맨은 수십 년간 일본의 영웅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본 아이들은 아빠라는 단어보다 호빵맨이라는 단어를 먼저 배운다”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이우일 그림
호빵맨의 원작자 만화가 야나세 다카시 역시 일류나 천재 같은 수식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1919년 2월6일에 태어난 그는 자신의 유년기를 ‘열등감 덩어리’라고 회고했다. 수줍음 많은 성격에 몸도 약해서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외모도 성적도 빼어난 동생과 곧잘 비교되었다.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아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20대의 절반을 전쟁터에서 보내야 했다. 전쟁으로 동생을 잃고, 지독한 굶주림에 시달린 뒤 그는 “나라가 주장하는 정의는 믿을 수 없다”라며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이야말로 절대적인 정의”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이 경험은 호빵맨을 탄생시킨 밑바탕이 됐다. 그가 1969년 잡지에 기고한 동화에는 하늘을 날면서 분쟁지역의 배고픈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아저씨가 나온다. 1973년 펴낸 그림책에서 비로소 사람 모습이 아닌, 익숙한 둥근 얼굴의 호빵맨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후 1988년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모으며 야나세 다카시는 69세에야 비로소 만화가로서 첫 대표작을 남기게 되었다.

호빵맨이 자기 머리를 떼어주는 설정이 아이들 보기에 잔인하다는 항의도 있었다. 하지만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남을 도울 수도 없다는 것이 그가 세상에 전하고픈 메시지였다. 호빵맨이 악당과 싸우는 과정에서 무기로 마을을 부수거나 누구도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는 것도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그다운 발상이었다.

일흔이 다 되어서야 찾아온 전성기가 야속하지는 않았을까. 야나세 다카시는 “살아 있는 한,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라며 과거를 아쉬워하기보다는 현재를 즐기려고 노력했다. 80대의 나이에도 가수, 작곡가에 도전하며 끊임없이 화제를 낳았다.

90대에 접어들며 암과 싸우느라 은퇴를 생각하던 그를 붙잡는 사건이 일어났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자 시민들이 라디오 방송에 ‘호빵맨 행진곡’을 신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공포를 겪는 어린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지만, 호빵맨을 보며 자란 어른들도 희망찬 노래 가사에 큰 위로를 얻었다. 호빵맨 행진곡의 작사가이기도 한 야나세 다카시는 “죽기 전까지는 현역”을 선언하며 이재민 돕기에 나섰다.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지진 피해를 당한 미야기 현을 방문했다. 그가 미야기 현에 남긴 호빵맨 그림에는 “내가 하늘을 날아갈 테니까, 꼭 너를 구할 거니까”라는 글이 함께 적혀 있다.

“내가 하늘을 날아갈 테니까, 꼭 너를 구할 거니까”

야나세 다카시의 에세이집 <네, 호빵맨입니다>(지식여행 펴냄, 2017)에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영웅이 전하는 정의와 용기의 말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약한 영웅이란 호빵맨을 뜻하는 동시에 야나세 다카시를 칭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초능력은 없지만 그렇기에 오래도록 가까이에서 함께할 수 있는 영웅 말이다. 지금은 천국의 베이커리에 있을 그이지만 이제는 그를 꼭 닮은 호빵맨이 어린이 곁에 있다. 이 아이들이 자라 누군가의 부모가 되더라도 야나세 다카시가 남기고 떠난 희망의 메시지만은 여전히 모두의 마음속에 ‘따끈따끈’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 이번 호로 ‘덕후의 달력’ 연재를 마칩니다.
 수고해주신 필자들과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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