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남과 북을 철벽같은 분단으로 갈라놓았어. 이후 남북은 모든 분야에서, 모든 종류의 경쟁을 펼치게 돼. 여기서 빠질 수 없는 게 스포츠야. 평창 동계올림픽 선수촌에 내걸린 인공기가 크니 작니,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소인국의 소인들처럼 자잘한 시비가 벌어지는 풍경을 보면서 아빠는 남북 분단과 흐름을 같이한다 할 남북 스포츠 대결의 역사를 훑어보고 싶어졌어.

국제 스포츠 무대는 남쪽의 데뷔가 빨랐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체육인으로 맹활약했던 이상백 등이 주축이 돼 2차 세계대전 후 처음 열린 1948년 런던 올림픽의 문을 두드린 거지. 아직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서기도 전이었어. 참혹한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한국은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했고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북한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렸어.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은 올림픽 경기에 참석할 기회가 막혀 있었어. IOC의 원칙은 “1국가 1NOC”, 즉 한 나라에는 하나의 올림픽위원회가 있어야 한다는 거였거든. 그래서 동·서독도 단일팀을 구성해 올림픽에 출전한 바 있어. 한국은 유엔 결의로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인정받고 있었고 이 현실이 올림픽 무대에도 적용된 거야. 그 결과 북한의 가입 신청은 번번이 거부됐지.

온갖 노력 끝에 북한은 1963년 정식으로 IOC에 가입하는 데 성공했고,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하지만 국호(國號) 사용 등 몇 가지 문제가 얽혀서 올림픽 참가를 거부하고 돌아가버려. 도쿄 올림픽 예선에서 남자 배구와 여자 배구는 최초의 남북 대결을 벌여 1승1패를 기록했는데, 하계올림픽에서의 남북 정식 대결은 미뤄졌어. 1964년 2월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은 북한에 확실하게 ‘밟혔다’. 한국은 1948년 노르웨이 오슬로 동계올림픽 이후 꾸준히 동계올림픽에 출전했지만 메달을 단 한 개도 따지 못했는데, 처음 출전한 북한이 한필화라는 천재 스케이트 선수를 앞세워 냉큼 은메달을 획득해버린 거야. 당시 신문 기사를 보자. “한필화는 평양체육대학 3년에 재학 중이다. 신장이 165센티미터, 뚱뚱한 몸집에 눈이 째진 살짝 곰보로 여성다운 점은 찾아볼 수 없는데…(〈동아일보〉 1964년 2월20일자).” 쓴웃음이 나오지 않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동포의 메달을 축하는 못할망정 살짝 곰보에 눈이 째졌다니. 그런데 그녀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어. 한필화 선수의 오빠 한필성씨는 남한에 살고 있었거든. 필성씨는 북한 선수단 사진에서 동생을 알아보았고 7년 뒤 삿포로 동계올림픽 프레올림픽 참석차 일본에 온 한필화 선수와 기적적인, 그러나 참으로 슬픈 전화 상봉을 하게 돼. 

ⓒ연합뉴스1990년 삿포로 동계 아시안게임 선수촌에서 한필성씨(오른쪽)가 동생 한필화씨와 인사하고 있다.

남북한의 자존심 대결은 곧 들이닥쳤어. 당시 국기(國技)로 인정받던 축구에서였지. 남한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 대표로 출전하고 초기 아시안컵을 제패하는 등 아시아의 ‘호랑이’로 자임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북한이 초특급 태풍으로 국제 무대에 등장해. 1966년 영국 런던 월드컵 예선에서였어.

평균 신장 165㎝의 작달막한 키였지만 선수 전원이 100m를 11초에 끊는 무시무시한 준족, 그래서 2년 뒤 청와대를 습격한 124군 부대와 함께 훈련받았다는 루머까지 돌았던 이 천리마 축구팀은 괴력을 발휘했어. 한국팀을 괴롭힌 오스트레일리아 대표팀을 스코어 6대1로 맹폭할 정도였지. 북한의 전력을 알아본 한국은 어떻게 했을 것 같니? 예선 출전을 포기한단다. FIFA, 즉 국제축구연맹에서 벌금을 부과했지만 없는 살림에 기꺼이 벌금을 내고 예선에 나가지 않아. 돈은 아깝지만 북한에 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 북한팀은 월드컵에 출전해 거함 이탈리아를 격침하는 세계 축구사에 길이 남을 이변을 연출하며 8강에 진출해서 세계 축구팬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기지.

ⓒ대한축구협회1966년 북한팀이 잉글랜드 월드컵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승리해 8강에 진출했다.

명색이 국기라 자처하고 국민들의 관심이 가장 높았던 스포츠인 축구에서 북한이 저렇게 두각을 드러내는 걸 보며 남한 사람들은 극심한 열등감에 시달리게 돼. 이 배 아픔을 해결하겠다고 나선 게 중앙정보부였어. 요즘 말로 하면 국정원. 당시 중앙정보부의 부훈(部訓)이었던 ‘음지에서 일하면서 양지를 지향한다’에서 따온 양지(陽地) 축구팀을 만들고 대한민국에서 공 좀 찬다는 선수들을 죄다 소집해서 맹훈련을 시키게 된다. 당시로서는 꿈같은 얘기인 유럽 전지훈련도 가고 대기업 수준을 훨씬 넘는 월급까지 주었다니 당시 한국 정부의 ‘염원’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지 않겠니. 이 양지팀이 북한팀과 맞붙는 일은 없었다만 말이다.

“원수의 심장을 겨냥하고 방아쇠 당겼다”

그런 분위기에서 멕시코 올림픽이 다가왔어. 북한의 올림픽 참가는 공공연한 사실이 됐지. 올림픽 무대에서 남북이 정면으로 맞붙는다는 건 상상 이상의 부담감이었어. “한국 올림픽 사업에 일대 전환점을 가져오게 됐을 뿐 아니라 보다 새로운 차원의 임전태세(臨戰態勢)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긴박한 입장”(〈동아일보〉 1968년 10월12일자)이었다니 어느 정도인지 알겠지? 그러나 또다시 북한의 정식 국호,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의 표기 문제로 IOC와 틀어진 북한 선수단은 쿠바까지 왔다가 평양으로 가버린다. 한국 선수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거야. 1972년 뮌헨 올림픽은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외나무다리로 다가왔지.

1972년 무렵까지 국력을 두고 보자면 북한이 여러모로 남한을 앞서고 있었어. 이는 뮌헨 올림픽 출전 선수단 규모에서도 드러난단다. 북한 선수단은 무려 192명, 남한 선수단은 겨우 68명이었어. 이 대회에서 북한은 또 한 번 남한의 자존심을 짓밟아. 그때까지 남한은 올림픽에 개근하다시피 출전해왔으면서 금메달을 단 한 개도 따지 못했는데 북한은 첫 출전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거야. 북한의 사격 금메달리스트 이호준은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답한다. “원수의 심장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뮌헨 올림픽에서 벌어진 몇 차례 남북 대결에서 한국은 북한에 완패했어. 동메달을 놓고 겨룬 여자 배구도 북한에 무릎을 꿇었고 복싱에서도 졌거든. 한국팀 성적은 은메달 달랑 하나인데 첫 출전한 북한은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를 수확했지.

1974년 또 하나의 외나무다리가 남북 사이에 놓인다.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이었지. 테헤란 아시안게임은 1974년 8월31일 개막식이 열렸어. 그 보름쯤 전,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노린 총격이 있었고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아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지. 용의자는 조총련계 재일동포 문세광이었고 한국 정부는 그가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고 발표했어. 선수단이 테헤란으로 떠난 건 8월17일, 사경을 헤매던 육 여사가 숨진 직후였어. 선수단은 일동 묵념을 하고 테헤란으로 날아갔는데 승무원들은 가슴에 ‘이기고 돌아오라’는 리본을 달고 있었단다.

테헤란에서 남북은 여러 종목에서 정면승부를 벌이게 돼. 그 이전 두 차례 대결에서 패배 후 절치부심했던 여자 배구팀이 북한을 이긴 순간 선수단은 선수고 코치고 임원이고 할 것 없이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해. 마치 우승이라도 한 듯이 말이야. 당시 한국 선수단에는 현역 국회의원도 포함돼 있었어. 전남 장흥·강진·영암을 지역구로 했던 황호동 의원은 역도 선수 출신이었지. 그에 따르면 테헤란 아시안게임 직전 김택수 체육회장이 찾아왔다는구나. “북한과 메달 한두 개를 놓고 순위 경쟁을 할 것 같으니 선수로 뛰어주시오(〈서울신문〉 2009년 1월22일자).” 나이 마흔에 가까운 전직 역도 선수이자 ‘의원님’은 기꺼이 테헤란으로 날아가 은메달을 따낸다. 그 외 여러 경기에서도 불꽃 튀는 대결이 벌어졌는데 막판 메달 집계에서 한국은 북한에 간발의 차로 뒤졌어. 북한이 금메달 18개, 은메달 14개, 동메달 17개였고 남한은 금메달 16개, 은메달 26개, 동메달 15개였거든. 남한이 또 한 번 분루를 삼키려는 찰나 ‘기적’이 일어났다. 북한의 역도 3관왕 김중일이 도핑 테스트에 걸려 메달이 박탈당한 거야. 북한은 펄펄 뛰었으나 도리가 없었고 한국은 좀 머쓱하긴 하지만 어쨌든 북한에 앞선 4위를 차지했어.

여전히 스타일을 구긴 종목이 있었어. 다름 아닌 축구였단다. 이미 북한 축구는 완연히 쇠락해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남한은 월드컵 8강에 빛나는 북한 축구가 두려웠어. 다른 종목은 몰라도 축구에서 깨졌다가는 글자 그대로 ‘공공의 적’이 될 판이었으니까. 다른 조에 속했던 남한은 2차 리그에서 북한과 만나지 않기 위해 쿠웨이트전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4대0. 2차 리그에서 말레이시아만 꺾으면 한국은 동메달 결정전에 나갈 수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북한과의 벼랑 끝 대결이 불가피해 보였지. 한국은 말레이시아에 고의적으로 패한다. 3대2. 이게 웬일이야, 북한이 3-4위전에서 말레이시아에 졌지 뭐냐.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북한팀 전력이 상상 이상으로 약했던 거야.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한국은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 동메달 4개로 동메달 2개 차이로 북한을 이겼다. 축구에서는 북한이 올림픽 본선에 나온 반면 한국은 예선 탈락함으로써 콤플렉스는 더 쌓였지. 다른 종목에서의 남북 대결은 이제 예사로 벌어졌지만 축구 대결은 좀체 성사되지 않았어. 1976년 아시아 청소년축구대회에서 남북은 처음 만났고 북한이 1대0으로 남한을 꺾는다. 1978년 같은 대회에서 한국 청소년팀은 승부차기 끝에 6대5로 이겨 축구 남북 대결 사상 첫 승리를 맛보지. 이 팀의 주장이 이번 AFC U-23 축구대회에서 베트남 열풍을 불러온 박항서 감독이었단다.

묘한 일이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남한 경제와 국력이 북한을 추월하기 시작했는데 스포츠에서도 그런 양상을 보인다.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또 한 번의 남북 대결을 벌여 완승을 거뒀어. 남한 금메달 18개, 북한 금메달 15개였지. 개막식 실황 중계 때 북한팀의 입장을 송두리째 지워버리는 북한 콤플렉스를 발휘하긴 했지만 이미 한국 스포츠는 남북 대결에 목을 매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지. 방콕 아시안게임 폐막식 직전 벌어진 남북 축구 대표팀 간의 첫 대결에서 남북은 120분 혈투를 거치고도 0대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해 공동 우승을 했어. 그로부터 2년 뒤 1980년 쿠웨이트에서 열린 아시안컵 준결승전에서 남한 축구팀은 또다시 북한을 만나. 한국 노동자 수만명이 쿠웨이트에 ‘외국인 노동자’로 나가 있던 시절, 경기장은 남쪽의 홈그라운드였어. 분위기는 사뭇 비장했어. 모름지기 남북 대결이란 항상 ‘초전박살’과 ‘명령만 내리소서’의 대결이었고 ‘새마을’과 ‘천리마’의 경주였으며 ‘멸공통일’과 ‘남조선 해방’의 대리전이었으니까.

한국은 전반 초반에 1골을 먹고 계속 끌려갔어. 북한팀은 공을 슬슬 돌리며 시간을 끌었고 후반전도 단 10분 남은 상황. 역시 북한에는 안 되나 보다 한숨에 땅이 꺼질 무렵, 한 선수가 흐르는 공을 악착같이 쫓아가 크로스를 올렸는데 이게 공격수 정해원 선수의 머리에 덜컥 걸려버려. 골이었어. 155마일 휴전선 이남은 거의 뒤집어졌다고 해도 무방할 거야. 쿠웨이트에서도 경기장 붕괴가 걱정될 만큼 대환호가 휩쓸고 지나갔지. 경기 종료 2분 전 또 한 번 정해원이 왼발 강슛을 날려 북한 네트를 뚫었을 때 밤새 경기를 지켜본 사람들은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환호했어. 수훈 선수 정해원도 마찬가지였고. 그는 달려드는 모든 선수를 뿌리쳤어. 한 명은 유도하듯 메쳐버리고 내처 벤치로 달려갔어. 그러고는 뼈를 깎는 심경으로 경기를 지켜보았을 코치와 격렬한 포옹을 나눴지. 그것은 사지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의 포옹이었어. 그렇게 한국은 북한을 넘어섰단다.

“기왕이면 동포가 본선에 나가야”

이렇게 슬프고도 치열한 라이벌이 또 있었을까? 한번 대결하려 들면 목숨을 걸다시피 악을 쓰고 싸워야 했던, 경기장 안 사람이나 경기장 밖 관중이나 작은 전쟁을 치러야 했고 경기의 승패가 전투의 승패라도 된 양 땅을 치거나 하늘을 찔렀던 그런 대결이 축구에선 흔하다. 하지만 그 열광의 뒤에도 통한의 이면에도 서글픔이 한 바가지였던 기괴한 라이벌전이 세계 역사에 또 있었을까?

ⓒ연합뉴스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 단일팀으로 참가한 현정화(오른쪽)·이분희 조.

스포츠는 또 스포츠 특유의 매력이 있는 법이지.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때 공동 우승을 차지한 후 남한 축구팀 주장 김호곤은 시상대에 오르려다가 북한 선수에게 두 번씩이나 저지당한다. 여기서 주먹이 날아갔으면 아마 또 한 번의 동족상잔이 빚어졌겠지만 김호곤은 얘기했다고 해. “종민씨(북한 주장 김종민), 우리끼리는 몰라도 기자들 있을 때는 좋게 포즈를 취합시다(〈스포츠조선〉 2010년 3월15일자).” 그 말 한마디에 김종민은 김호곤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선수들도 어깨동무를 하고 포즈를 취할 수 있었다는구나. 1994년 서울 월드컵 예선 때 발생한 ‘경우의 수’에서 한국이 반드시 북한을 큰 점수 차로 이겨야 했을 때 북한 감독은 이렇게 말하지. “기왕이면 동포가 본선에 나가는 거이 좋지 않갔습니까?” 북한 수비진은 ‘쉽게’ 허물어지고 3대0으로 패한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는 남북 응원단이 함께 어우러지며 서로 응원하는 흐뭇한 풍경을 연출했고 이어 남과 북의 축구 대표팀이 번갈아 서울과 평양을 방문하며 ‘경평전(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있었던 서울과 평양의 축구 대결)’을 재연하기도 했어. 뭐니 뭐니 해도 남북 스포츠가 함께 썼던 최대의 드라마는 1991년 일본 지바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와 세계 청소년축구대회에 출전한 남북 단일팀이었겠지. 남북의 탁구 여자 선수들이 합심하여 세계 최강 아니 우주 최강이라 해도 될 만한 중국을 무너뜨렸을 때, 친북 조총련과 친한 거류민단 재일동포 사이 수십 년 쌓인 반목을 무너뜨렸지. 남한 청년이 멋모르고 “김일성이다!” 소리치자 북한 청년이 포크를 들고 “주석님 모독한 놈 죽인다”라고 멱살을 잡는 상황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한 팀을 이뤄 세계 청소년 축구 8강에 올랐던 남북 청소년 대표 단일팀의 활약을 보면서 느낀 흥분은 지금 떠올려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단다. 적어도 스포츠에서 우리는 통일을 이뤄보지 않았겠니. 스포츠는 스포츠라서 의미가 있어. 아무리 적개심 그득한 사이라도 공정하게 겨루고 서로를 격려할 수 있고, 생각지도 못했던 서로의 공통점, 깨닫지 못했던 서로의 속내를 교환할 수 있는 화합의 길을 터주기도 한단 말이지.

ⓒ연합뉴스1991년 세계 청소년축구대회 조별 리그에서 1승1무1패로 8강에 진출하게 된 코리아 팀의 선수와 코치진이 관중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아빠는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에 그다지 찬성하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그들이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내주기를 기원하고 있어. 졸속으로라도, 좀 억지로라도 만들어낸 이 가냘픈 단일팀이 ‘미친 듯한’ 모습으로 남북 모두를 열광시켰으면 좋겠어. 그러면 요즘 추위보다도 더 얼어붙은 남북에 조금이라도 훈훈한 바람이 스며들지 않겠니. 남북을 갈라놓았던 전쟁이라는 이름의 악마를 한 치라도 더 밀어낼 수 있지 않겠니.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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