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방남은 갑작스럽게 이뤄졌다. 본인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 지난 2월11일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주최한 만찬 건배사에서 그녀는 “솔직히 이렇게 갑자기 오게 되리라고 생각 못했습니다”라고 털어놓았다. 정부 당국자들도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충분히 예상했지만 ‘김여정 카드’는 뜻밖이었다고 한다. 고위급 대표단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 이틀 전인 2월5일 김여정은 평양역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북한 예술단을 배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방남이 결정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2월7일 우리 쪽에 통보된 명단에 그녀가 포함됐다. 그렇다면 2월6일 ‘김여정 카드’가 전격 결정되었다는 의미다. 이 얘기는 곧 남북 정상회담 카드를 쓸지 말지에 대한 최종 결정 역시 2월6일쯤 내려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김여정 카드의 의미가 바로 정상회담 특사였기 때문이다.

ⓒ평양 조선중앙통신2월13일 평양에 귀환한 김여정 제1부부장(오른쪽)과 악수하며 웃고 있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올해 신년사에서 “북남관계를 개선해 뜻깊은 올해를 민족사에 특기할 사변적인 해로 빛내어야 한다”라고 말하기는 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첫 만남부터 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은 전례가 없다. 그만큼 급박한 이유가 있었다는 얘기다. ‘펜스 부통령 방한에 대응하기 위해서’라거나 ‘대북 제재의 이완’ 내지 ‘한·미 동맹의 균열’ 유도를 위해 ‘최대 히든카드’를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여정 제1부부장의 방남 결정이 내려지기 전 북한발로 전해진 몇 가지 뉴스만 짚어봐도 북한이 서두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2월1일자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보자. 1월31일 리용호 외무상이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에게 ‘미국의 핵전쟁 도발 책동을 중지하기 위해 노력해달라’며 ‘이 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할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리용호 외무상은 이 서한에서 ‘미국의 핵전쟁 도발 책동’의 근거로 ‘북과 남이 마주 앉아 평화의 장을 열어나가는 시기에 핵 항공모함 타격단들을 비롯한 전략자산들을 조선 반도 주변에 끌어들이면서 정세를 고의적으로 격화시키려 하고 있고 겨울철 올림픽 경기대회 후 우리 공화국을 반대하는 침략적인 대규모 합동 군사훈련을 감행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점을 들었다.

한·미 연합 군사훈련에 대한 북한의 위기의식은 잘 알려져 있다. 리 외무상이 거론한 ‘전략자산 배치 움직임’에 주목해보자. 이 서한을 보내기 약 보름 전 미국의 긴박한 움직임에 대한 보도가 집중됐다. 1월16일 미국 태평양사령부는 웹사이트를 통해 “미국 루이지애나 주 박스데일 공군기지에 있던 전략 폭격기 B-52H 스트래토포트리스 6대와 약 300명의 병력이 괌 앤더슨 공군기지에 배치된다”라고 밝혔다. 미국 미주리 주 화이트먼 공군기지에서 괌으로 전진 배치된 B-2 3대와 함께 대북 압박 조치를 강화한 것이다.

북측으로선 1월16일 B-52H 전진 배치 소식이 1월14일자 〈뉴욕타임스〉 보도 여파로 더욱 긴박하게 다가왔을 수 있다.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 미국 내에서 전개된 군사 움직임을 집중 소개한 이 기사는 미국의 군사 움직임이 통상적인 훈련이 아닌 ‘한반도 전쟁 대비’ 훈련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지난해 12월 노스캐롤라이나 주 포트브래그에서 아파치 헬기와 치누크 헬기 48대를 동원해 군부대와 장비를 이동하는 훈련이 전개됐고 이틀 뒤에는 네바다 상공에서 제82공수사단 소속 병사 119명이 C-17 수송기에서 낙하 훈련을 펼쳤다는 것이다. 미국 전역의 군사 주둔지에서 예비역 사병 1000여 명이 해외에서 신속히 군 병력을 이동해야 할 때를 대비한 동원센터 구축훈련 계획도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포트브래그 훈련은 최근 수년간 볼 수 없었던 최대 규모 공습 훈련의 일부였으며 네바다 주의 낙하 훈련도 종전 훈련 대비 동원 규모가 두 배에 달했다. 훈련이 이뤄진 시점이나 범위를 고려하면 북한과의 전쟁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는 게 안팎의 평가다”라고 전했다.

거듭된 ‘한반도 전쟁 대비’ 훈련에 긴장

〈뉴욕타임스〉 기사에 대해서 중국 전문가들이 이례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다즈강 헤이룽장성 사회과학원 동북아연구소장은 인민일보 자매지 〈글로벌타임스〉 인터뷰에서 “미국이 한국·일본 등 동맹국과 함께한 연합훈련은 최근 몇 년간 자주 있었지만 자국 영토에서 자체 훈련을 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장후이즈 지린대학 동북아연구원 교수도 “북한의 미국 본토를 겨냥한 잠재적 위협에 대해 미국이 진지하게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분석했다.

ⓒ연합뉴스2월10일 문재인 대통령(왼쪽)이 김여정 제1부부장과 오찬을 마치고 이동하고 있다.

미국의 이런 움직임을 북한은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았을까?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의 알렉산드르 보론초프 박사는 지난 1월10일 북한 전문 웹사이트 ‘38노스’에 북한 당국의 ‘전쟁 공포증(warphobia)’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기고문을 실었다. 보론초프 박사의 기고문은 지난해 11월 북한을 방문해 외무성 산하 ‘군축 및 평화연구소’ 전문가들과의 대화 내용을 다룬 것이다. 그는 그들(북한)이 “미국과의 전쟁을 매우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라고 전했다. 즉 미국과의 전쟁을 ‘언제 일어날지의 문제만 남은’ 당연한 절차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리용호 외무상이 서한에서 거론한 전략자산의 배치와 한·미 연합 군사훈련에 대한 북한 당국의 시각도 잘 드러나 있다. ‘북한을 지척에 두고 미국이 실시하는 정기적·비정기적 훈련’과 관련해 북한 전문가들은 ‘그 규모만 커진 게 아니라 대규모 충돌에 대비해 미국이 특정한 작전상 목표를 달성하고자 근본적으로 새로운 요소를 도입했다’고 보는 것으로 전했다. 즉 특정의 전쟁 계획에 따른 훈련이라는 얘기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왜 동생인 김여정 카드를 꺼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만한 단서도 기고문에 들어 있다. 2월13일자 〈조선중앙통신〉은 “김여정 동지는 이번 활동 기간에 파악한 남측의 의중과 미국 측의 동향 등을 최고 영도자 동지께 자상히 보고드리었다”라고 보도했다. 여기서 언급된 ‘남측의 의중과 미국의 동향’에 대해 국내에서 구구한 해석이 난무했다. 보론초프 기고문에는 “한반도 긴장 관계가 일촉즉발인 상황임에도 한국에서는 다르게 인식하는 것 같다며 양국 간 인식 차에 놀라움을 표했다”라는 북한 전문가들의 반응을 전한 대목이 나온다. 기고문에는 또 북한 전문가들의 정세 판단 발언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 기조를 고려할 때 미국은 북한과 대규모 군사 충돌로 인해 끔찍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상황도 충분히 감내할 것 같은데, 한국 국민은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을 일으킬 리 없으며 현재의 위기 분위기나 호전적인 수사, 긴장 고조를 일종의 연출로 여긴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에 나설 가능성이 날로 커지는 현실을 한국인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북한은 이런 환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시사IN〉과 인터뷰한 고위급 탈북자는 북한 체제 특성상 외무성 산하 연구소 전문가들이 상부 허락 없이 내부의 민감한 정세 얘기를 밖에 드러낼 수 없다고 단언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상부의 허락이 있었다는 얘기다. 리용호 외무상의 서한 역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허락 없이는 절대 보낼 수 없다. 즉 보론초프 기고문에 등장한 ‘군축 및 평화연구소’ 전문가들의 인식과 리용호 서한, 그리고 김여정 제1부부장의 갑작스러운 방남, 그리고 남북 정상회담 제안은 같은 축 선상의 정세 인식에 기반하고 있는 셈이다.

“선제공격 가능성이 날로 커지는 현실”

특히 보론초프 기고문에 나오는 ‘북에 대한 선제공격 가능성이 날로 커지는 현실’은 김여정 방남 결정 시점을 전후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 미국의 ‘코피 전략(bloody nose)’으로 사실에 기초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북에 대한 제한적 선제타격 전략을 뜻하는 코피 전략은 지난해 12월20일 영국의 〈텔레그래프〉가 처음 보도한 이래 간헐적으로 나왔다. 그러다 “빅터 차 내정자가 광범위한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북한에 제한적 타격을 가하는 방안, 즉 ‘코피 전략’으로 알려진 위험한 개념을 놓고 미국 국가안보회의(NSC) 관리들에게 우려를 제기했다”라는 1월30일자 〈워싱턴포스트〉 기사를 계기로 광범위하게 알려졌다. 북한으로서는 자신들의 우려를 확인한 계기가 되었다.

ⓒU.S. Air Force오산 공군기지 상공에서 훈련 중인 B-52 폭격기(가운데)와 우리 공군 F-15K, 미군 F-16 전투기.

미국의 선제공격 가능성을 차단하고 올림픽 이후 재개될 한·미 연합 군사훈련에 따른 긴장 고조에 대처하기 위해서 남북 정상회담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 도달했을 것이다. 아울러 한반도 전쟁 가능성에 대한 ‘남측의 의중’과 남측이 이해하고 있는 ‘미국의 군사 동향’을 파악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있는 인물은 동생인 김여정 제1부부장밖에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과연 언제부터 미국의 공격 가능성을 실감했을까? 이러한 실감은 그동안 북한이 한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는 지난 1년간 북한 행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일본에서 발행되는 잡지 〈문예춘추〉 2월호에 ‘미국 태평양군 관계자’를 인용한 관련 기사(‘미군 공격 결단의 때는 3월이다’)가 실렸다. 미국 정보기관들이 작성한 ‘최종 정보 보고서(스냅숏페이퍼·Snapshot Paper)’에 북한이 ‘ICBM의 대기권 재돌입·생물병기 탄두 미사일·SLBM 기술’을 확보하는 시기로 적시된 2018년 3월 미국이 대북 공격에 나설 것이라는 ‘선정적’인 내용이 담겨 있지만, 이 기사가 묘사한 북·미 간 지난 일련의 과정은 참고할 만하다.

지난해 한반도 위기는 2월12일 북한이 ‘새로운 전략무기 체계’라 명명한 중장거리 미사일 북극성 2호를 발사하면서 시작됐다. 미국 태평양군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4월 말 트럼프 정부는 중국·러시아를 통해 ‘5월 말까지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핵 폐기 프로세스에 합의하지 않으면 미국은 군사 작전을 포함해 모든 옵션을 발동하겠다’고 통보했다. 북한이 응하지 않자 6월부터 미국 정부는 ‘정치하면서도 성실하게 프로세스’를 밟아나가 7월 말에는 미국 태평양군·전략군·수송군·특수작전군을 망라한 작전 계획을 완료했고, 단위별로 그에 맞춰 훈련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예춘추〉는 “미군은 대북 공격 작전 중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고”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이 내려지면 수 시간 후 북한의 전략 목표(김정은 위원장을 필두로 한 지도부)에 대한 압도적 공격을 개시하는 것이 가능한 상태이다”라고 보도했다.

보론초프 기고문에서 ‘미국의 군사훈련이 특정한 작전상 목표를 달성하고자 근본적으로 새로운 요소를 도입했다’고 북측이 인식한 이유도 설명된다. 즉 미군이 이번에 도입한 군사 독트린은 기존의 ‘공해전(AirSea Battle) 전략’이 아니라 ‘글로벌 리치(Global Reach) 전략’이다. 대규모 해군력과 공군력을 동원하는 게 아니라 전 세계 어디나 24시간 안에 도달한다는 작전 개념에 입각해 공군력과 해군력의 신속 전개에 훈련의 초점이 맞춰졌다는 것이다.

이 기사대로라면 북한은 지난해 4월 말 이미 미국의 최후통첩을 받은 전쟁의 한 당사자가 되었다. 즉, 지난해 북한의 행태들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각국에 특사를 보낼 때 북한 측도 내심 특사를 기다렸으나 오지 않아 불만이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북측이 남측 인사와의 비공식 접촉에서 한 얘기라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북한은 미국의 최후통첩에 응하는 대신 지금처럼 당시에도 남북관계로 맞서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2017년 7월28일 북한은 대륙간 탄도미사일 ‘화성 14호’의 2차 시험발사를 실시했다.

이게 무산되자 지난해 5월14일 화성 12호 발사를 필두로 미사일 사거리 연장과 6차 핵실험 등 핵무력 완성 전략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지난해 7월28일의 화성 14호 발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무리할 만큼 미국 본토 타격력 확보에 매달린 이유도 설명된다. 보론초프 기고문에서 북측이 ‘미국 본토를 사정권에 두는 핵무기 개발은 그걸 사용하겠다는 게 아니라 북한 정권의 생존 보장을 위한 것’이라고 한 얘기 역시 어느 정도는 진정성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발사한 화성 14호와 15호는 오히려 미국의 대북 공격 의지만 강화시켜 북한 정권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다.

북한이 한국이나 미국의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허세를 부려온 나쁜 습성이 문제의 시발점이었을 수 있다. 지난해 신년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대륙간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가 마감 단계’라며 미국을 자극한 데 이어 트럼프 정권이 출범도 하기 전인 지난해 2월12일 북극성 2호를 발사해 분노부터 산 것은 명백한 패착이다. 그러나 ‘전쟁 공포감’은 북한에만 있지 않다. 북한이 죽기 살기로 미국 본토 타격 능력을 확보함으로써 미국도 불안해지긴 마찬가지다. 군사 공격 계획을 완비했으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적 결단에 앞서 외교적 노력을 지지하는 이유다.

원인을 알면 해법은 간단하다. 미국과 북한 양자가 서로의 전쟁 공포감을 이해하고 그것을 촉발하는 일체의 행위부터 중단해야 한다. 평화를 정착시킬 방법에 대해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그것만이 모두가 살길이다.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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