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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벌벌 떨게 한 조선 최고의 자전거 선수

2018년 03월 09일(금) 제546호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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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 안에는 인간 사회의 희로애락과 다양한 감정과 경험이 녹아들어 있고 절절한 사연이 담겨 있다. 엄복동은 식민지 조선의 울분을 실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알다시피 아빠는 스포츠를 전혀 즐기지 못하는 체질이지만 보는 스포츠는 무척 즐긴다. 왜 스포츠를 좋아하는지 한 줄로 답하라면 아빠는 “스포츠 안에는 스토리가 있다”라고 얘기하겠어. 물론 스포츠는 개인 대 개인, 또 그 개인들이 모인 팀 대 팀의 경합이지만 사회적·역사적 맥락이 없는 ‘순수한 개인’이란 존재가 가능하지 않듯 ‘순수한 스포츠’라는 명제도 성립하기 어려울 거야. 당연히 스포츠 안에도 인간 사회의 희로애락과 다양한 감정과 경험이 녹아들 것이고 절절한 사연들이 샘처럼 솟아나겠지. 앞으로 몇 주 동안은 한국 스포츠사에 기록된 여러 인물의 얘기를 들려줄까 해.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인류의 한 발명품을 두고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힘을 얻어 보다 빨리 가기 위해 고안된 인간 정신의 창조물.”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바로 자전거야. 자전거가 조선 땅에 선보인 건 1884년으로 추정돼.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미국 정부는 미국 공사관 보호를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그중 한 명이었던 랜스 데일 대위가 자전거를 타고 제물포 거리를 누볐던 거야. 이 편리하고도 혁신적인 자전거는 금세 조선 사람들에게도 퍼졌어. 1906년에는 이미 훈련원 너른 마당에서 자전거 대회가 열릴 정도였으니까.

ⓒ문화재청
1923년 전 조선 자전거 경기대회에서 우승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엄복동 선수.
경술국치의 해 1910년에도 훈련원 마당에서 전 조선 자전거 대회가 열렸는데 우승자는 열여덟 살의 앳된 얼굴이었어. 그 이름은 엄복동. 불과 1년 전 일본인이 경영하던 자전거 수입 대리점 일미상회의 점원으로 취직해서 자전거를 처음 접한 청년이지. 일미상회는 평택에 있었는데 그는 서울에서 평택까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다고 해. 검색해보니 서울에서 평택은 65㎞쯤 되는구나. 하루 왕복 130㎞를 달린 ‘자전거 출퇴근족’.

1913년 <매일신보>와 <경성일보>가 공동 주최하는 자전거 대회가 인천·용산·평양에서 연거푸 열렸는데 여기에는 일본의 내로라하는 자전거 선수들도 참석했지. 경성 인구가 30만도 안 되던 시절 무려 10만명이 용산으로 몰려들었다고 해. “운동장 부근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넓은 대경주장 주위에서 송곳 세울 틈도 없이 사람이 열 겹 스무 겹씩 둘렀고, 산비탈 아래에서도 사람으로 가려져 오후 2시경에는 십만 인 이상으로 계수할 지경이라(<매일신문> 1913년 4월15일자).” 일본인 4명과 조선인 2명이 겨룬 이 대회에서 엄복동은 우승을 차지하고 ‘우승기와 용현상점에서 기부한 라지 자전거 한 채’를 받는다. 그 후 엄복동은 자전거 대회 우승을 휩쓸다시피 하면서 조선 최고의 자전거 선수로 명성을 드날리게 돼. 그리 미남은 아니었지만 장안의 기생들이 엄복동 선수 한번 보기를 소망했다고 하니 엄청난 스타였던 셈이야. 그가 스타가 된 가장 큰 이유는 독보적인 자전거 선수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어. 그는 일본인을 상대할 때 눈에서 불이 날 정도로 독기를 부렸다고 해. 일본인한테만은 지지 않겠다는 각오였다고나 할까. 1920년 조선 태형령이 폐지되기 전까지는 여차하면 주재소(파출소)에 끌려가 몽둥이찜질을 ‘합법적으로’ 당해야 했던 조선인들에게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낑낑대는 일본인 선수들을 저만치 떨어뜨리고 의기양양 독주하는 엄복동은 요즘 말로 하면 ‘사이다’ 같은 존재였던 거야. 사이클 원로 김장곤씨에 따르면 “그 양반이 나타났다 하면 일본 애들이 벌벌 떨었다”라고 할 정도니 그 통쾌함이 오죽했겠니.

이런 관계가 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1920년 5월2일 벌어졌단다. 경성시민 대운동회 행사 중 하나로 개최된 자전거 경주는 한국·중국·일본 선수들이 참여한 ‘국제 시합’이었어. 특히 일본 최고의 사이클 선수까지 특별 초청된 빅 이벤트였지. 열기 넘치는 경기 도중 선수 여러 명이 얽혀 넘어지면서 남은 건 엄복동과 일본 선수의 대결이었어. 특유의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엉덩이를 들어 올리며 스퍼트하는 습관을 여지없이 발휘하면서 그는 일본 선수를 제치고 나섰는데 갑자기 심판이 경기 종료를 선언했어. 이유는 “해가 져서 어둡다”라는 거였지. 엄복동은 여기서 조선 사람들이 일본인 앞에서 접고 살았던 ‘성질’을 폭발시킨다. 본부석으로 뛰어 올라간 엄복동은 어안이 벙벙한 일본인들 앞에서 우승기를 빼앗아 부러뜨려버려. “이 따위 걸 어디에 쓰려고!”

“떴다 보아라 안창남,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이런 조선인 앞에서 일본인들은 분기탱천 엄복동을 두들겨 패기 시작해. 그가 피를 흘리자 지켜보던 조선인들이 울컥했어. 3·1항쟁 이듬해로 아직 조선인들의 혈기가 가라앉지 않았을 때지. “엄복동이 맞아 죽겠다!” 조선인들은 엄복동의 이름 아래 하나가 돼서 그를 구타하던 일본인들에게로 몰려갔어. 난투극이 벌어지고 돌이 날고 피가 튀었다. 일본 경찰이 필사적으로 군중을 진압한 끝에 겨우 무마됐지만 이런 일을 겪은 엄복동과 그 자전거에 어떤 의미가 부여됐을지는 미루어 짐작이 가지 않니.

1972년 12월1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서구 원로 기자의 회고를 들어보자. 어떤 대회에서 분명히 엄복동이 일본 선수보다 앞서 골인했건만, 일본 심판은 일본 선수의 승리를 선언해. 그러자 관중들이 들고일어났고 일본인 심판 등은 근처 소나무 숲에 숨어 전전긍긍했다는구나. 그때 이서구 기자 자신이 본부석으로 가서 “누가 1등이냐?”를 따지고 “엄복동에게 1등을 줄 테니 제발 군중을 진정시켜달라”는 항복 선언을 따냈다고 해. 즉 비슷한 일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얘기지. 엄복동은 그런 난관을 뚫고 내달렸던 거야. “일본 선수에 떠밀려 두 번이나 넘어져 중상을 입고”(<동아일보> 1922년 4월6일자), “44바퀴째 넘어졌으나 원기를 내어 쫓아가 남보다 두 바퀴 세 바퀴를 앞서 영예의 우승기를 받으면서”(<동아일보> 1920년 5월21일자) 말이다.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한 번 넘어지고도 올림픽 신기록을 세운 우리  쇼트트랙 스케이트 선수들처럼.

1932년 사실상 은퇴한 뒤에 자전거 대왕 엄복동의 존재감이 새롭게 빛났던 건 1948년 런던 올림픽 사이클 선수 선발전 즈음이었을 거야. 1896년 아테네 올림픽 때부터 사이클은 정규 종목이었고 엄복동 정도의 실력으로 일본인들의 인정을 받았다면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 무대를 밟았을지도 몰라. 그러나 결코 그럴 수 없었던 엄복동이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사뭇 궁금하구나.

그의 말년은 행복하지 못했어.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전거하고만 살았던 그는 가산을 탕진하고 떠돌이로 지냈다고 해. 심지어 1950년 봄에는 세워져 있던 자전거가 탐나 절도를 하다가 체포됐고, 왕년의 엄복동을 알아본 검사가 관대히 기소유예로 풀어준 기록까지 있으니 그 형편을 짐작할 만하지. 그 후 전쟁 통에 폭격을 맞아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구나.

불꽃놀이가 끝나도 불꽃의 추억은 남듯, 힘없이 사위었으나 수많은 이들의 망막과 기억에 깊은 자국을 남겼던 이는 역사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살아나기 마련이지. 엄복동 또한 그럴 거라고 생각해. 일제강점기 조선 사람들이 일본에서도 몇 안 되는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 고국의 하늘을 날았던 안창남과 엄복동을 엮어서 불렀던 노래 가사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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