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고등학교 3학년 수업을 맡게 되었다. 이제 3학년이 된 아이들은 2000년 ‘밀레니엄 세대’라는 축복 어린 기대 속에 태어났지만, 중학생 때 세월호 참사를 겪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국정교과서로 공부할 뻔하다가 2학년 때 촛불을 들고 대통령 탄핵을 경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이 학생들 앞에서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를 숙주 삼아 불의가 싹트고,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세상에 참여하면 희망이 있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탄핵과 대선을 거치면서 학생들에게 한 이야기가 거짓말이 되지 않아 안도했다. 지난해 수업을 마무리하며 한 학생에게 “선생님을 통해 포기하지 않으면 이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라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이 학생들이 고3이 된 현재는 어떠한가? 고등학교 3학년 때야말로 ‘노력하면 된다’라는 ‘희망’이 ‘고문’으로 바뀌는 시기이다. 사회가 인정한다고 여겨지는 ‘인(in)서울 대학’을 가는 학생은 대개 학교에서 내신 성적 또는 모의고사 성적이 1·2등급인 상위 5%의 학생들이다. 내신 성적은 1·2학년 때 이미 나와 있고, 모의고사 성적은 3월 첫 주 성적에서 크게 차이가 나기 어렵다. 대한민국 입시는 공부해서 아는 만큼 인정받는 게 아니라 모두가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추월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 95%에 이르는 학생이 ‘추월할 수 있는 0.1% 가능성’ 때문에 모든 시간을 입시 공부에 쏟아붓는다. 희망을 못 느끼는 학생은 철저히 딴짓을 한다.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 교실은 ‘모두가 공부를 하고 있지만, 모두가 공부를 하고 있지는 않은’ 그런 공간이다.

학생들에게 진정한 희망을 만드는 일

ⓒ김보경 그림

실제로 어떤 학생은 이런 고민 상담을 하기도 했다. “계속 성적이 잘 안 나와 꿈을 갖게 되는 게 두려웠어요. 진로 희망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는 학생을 뽑는다니까 뭐라도 정해야 할 것 같은데… 그 꿈이 이루어진다고 먹고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냥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할까요? 공무원 시험은 고졸도 된다던데… 어떤 분야에서 일하든 공무원처럼 잘릴 걱정 없이 4대 보험만 된다면 내가 좋아하는 게 뭐일지 생각해볼 것도 같은데… 그런데 공무원 시험 학원 다니려면 돈도 있어야 할 텐데, 알바하면서 시험 준비를 할 수 있을까요?”

어른들은 10대들의 진로 희망 1순위가 공무원이라는 점을 두고 낭만도 없고 현실적이기만 하다며 타박한다. 사실 아이들의 이 꿈에는 ‘어떤 분야에서 일하든 해고될 걱정 없이 4대 보험이 보장되는’ 노동조건이 꿈과 끼를 가능하게 한다는 역설이 숨어 있다. 이조차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런 학생들에게 EBS 문제집 같은 것들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이 학생들에게 정치적 권한을 주는 게 낫지 않을까? 돈 걱정 없이 인생의 모든 시기에 꿈과 끼를 추구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교육감과 자치단체장을 뽑는 일에 당사자로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진정한 희망을 만드는 일 아닐까?

때마침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해 6월, 청소년의 투표로 ○○○○당을 심판하고 싶습니다’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아마도 청원자는 더 이상 어른들에게 맡겨봤자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달은 영리한 학생일 것이다. 올해 교단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너희의 인생을 등급에 맡기지 말고, 등급에 관계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라며 희망을 얘기하고 싶다.

기자명 조영선 (서울 영등포여고 교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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