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21일 일본 언론은 롯데그룹의 지주사인 일본 롯데홀딩스 신동빈 대표이사 사장(한국 롯데그룹 회장, 일본 이름 시게미쓰 아키오)의 대표권 반납을 일제히 보도했다. 신 회장이 법정 구속되고 1주일 뒤 롯데홀딩스는 이사회를 열어 그의 롯데홀딩스 대표이사직 사임안을 가결했다. 일본에서는 CEO가 구속될 경우 해임 또는 사임하는 게 관례다. 이틀 뒤 신 회장은 퍼시픽리그 소속 프로야구단 지바 롯데 마린스 구단주 자리도 내놓았다.

구단주 사임은 무척 의미심장하다. 신 회장은 1991년 1월 롯데 오리온스 사장 대행으로 그룹 경영에 참여했다. ‘신동빈표 개혁’을 단행했다. 홈구장을 가와사키 구장에서 지바 마린스 스타디움으로 옮겼다. 구단명도 지바 롯데 마린스로 바꾸고 메이저리그 출신 스타 감독 보비 밸런타인을 영입했다. 신동빈표 개혁으로 팀 색깔이 바뀌고 성적도 오르면서 인기를 끌었다. 그는 일본 재계에서 일약 ‘시게미쓰 주니어’로 떠올랐다.

ⓒ연합뉴스2005년 11월25일 31년 만에 일본 프로야구에서 우승한 지바 롯데 마린스의 신동빈 구단주(왼쪽 세 번째)가 기념 의식을 하고 있다.
야구단 개혁이 신 회장에게 주니어 호칭을 부여한 계기가 된 것은 신격호(일본 이름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전례 때문이다. 신 총괄회장은 1969년 경영난에 시달리던 도쿄 오리온스를 인수해 구단명을 롯데 오리온스로 바꾸었다. 다만 구단주는 유임시켰다. 당시 구단주는 영화 제작자 나가타 마사이치였다. 나가타는 일본 최초로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와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 (1950년)을 제작해 ‘영화계의 아버지’로 불렸다. 그는 태평양전쟁 당시 국책 영화 제작에 앞장서 연합군 최고사령부로부터 공직 추방 조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나가타는 막강한 정계 인맥 덕분에 일명 ‘픽서(fixer·해결사)’로 통했다. 나가타 후임도 롯데그룹 출신이 아니었다. 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의 고교 동창이자, 기시 노부스케 정권에서 총리비서관을 지낸 나카무라 나가요시였다. 신 총괄회장과 나가타의 만남을 주선한 이가 바로 기시 노부스케였다. 롯데그룹은 일본에서 권력과의 탄탄한 ‘파이프라인’을 자랑하며 성장했다. 야구단이 신격호 총괄회장과 권력을 연결하는 파이프라인 노릇을 했다.

지바 롯데 마린스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끈 신동빈 회장이 ‘신(辛) 주니어’가 아닌 ‘시게미쓰 주니어’로 불린 것도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셔틀 경영’을 편 신 총괄회장은 1987년 미국 경제지 〈포브스〉의 억만장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 이름이 아니었다. 신 총괄회장은 ‘시게미쓰 다케오’라는 이름으로 일본인 부호 12명과 함께 리스트에 올랐다. ‘신격호’가 아닌 시게미쓰 다케오로 오른 것은 한국에서 신 총괄회장의 인지도가 낮아서가 아니었다. 롯데그룹은 이미 1967년부터 한국에 진출해 있었다. 한국에서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단 두 사람만 이름을 올렸다.

일본에서 신격호·신동빈 부자와는 ‘다른 길’을 걷는 한국인 사업가도 있다. 지난 5년간 줄곧 〈포브스 재팬〉의 일본판 억만장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2017년 11위, 2016년 9위, 2015년 7위, 2014년 12위, 2013년 8위) 한창우 마루한 회장이 주인공이다. 그는 신격호 총괄회장과 비슷한 시기(신 총괄회장은 1942년, 한 회장은 194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을 시작했다. 한 회장은 1972년 끽차점, 볼링장 등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 60억 엔이라는 거금을 빚졌다. 채무 변제를 위해 본업인 파친코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끝에 거대한 부를 일궜다. 그도 니시하라 쇼스케(西原昌佑)라는 일본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사용한 적은 없다. 2011년 일본에 귀화할 때도 일본식 이름을 정하거나 일본식 독음을 쓰는 관행을 깼다. 그는 ‘한창우’라는 한국식 이름과 독음을 그대로 사용하게 해달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해 관철시켰다(예컨대 추성훈 선수는 일본 국적 취득 후 ‘아키야마 요시히로’라는 이름을 쓴다).

ⓒ연합뉴스재일 동포 기업가 한창우 마루한 회장(아래)은 사회공헌과 더불어 민족주의적 활동에 적극 나섰다.
한반도 역사·문화 연구 활동 적극 지원

또한 그는 야마토 정권이 4세기 후반 한반도를 공격해 백제와 신라를 정벌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했던 재일 동포 역사학자 이진희 와코 대학 교수가 재정 문제로 계간지 〈삼천리〉의 발행을 중단하자, 새로 〈청구(青丘)〉를 창간하도록 권유하고 직접 발행인이 되었다. 한 회장은 일본과 한반도의 역사·문화에 관한 논문집인 〈청구학술논집〉도 창간했다. 1990년 사재를 털어 만든 한국문화연구진흥재단을 통해 필요한 재원을 조달했다. 한국문화연구진흥재단은 15년 뒤 그 명칭을 ‘한창우·철(哲)문화재단’으로 바꾸고 지원 분야를 예술과 스포츠로 확대했다. 이 명칭의 유래를 알면 한 회장이 어떤 계기로 사회공헌 활동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철’이라는 명칭은 1978년 8월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사고로 사망한 큰아들(한철, 당시 16세)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한 회장은 장남의 유품 가운데 초등학교 시절에 쓴 문집을 읽다가 “내가 사는 동네에 도움이 되고 싶다. 초등학교를 만들고 육교를 세우고, 주민회관을 세우고…. 초등학교에는 풀장과 야구장을 만들고 싶다”라는 글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뒤 한 회장은 사회공헌 활동에 적극 나섰다. 그는 또 사회공헌과 함께 민족주의적 활동도 강화했다. 예를 들면, 2010년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기획하던 지한파 배우 구로다 후쿠미와 재일 동포 3세 여성운동가 신숙옥을 지원했다. 참의원 선거가 있던 2013년 여름에는 “일본의 정치가들이 과거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모르는 척을 하고 있다. 독일처럼 주변국에 대해 제대로 사죄해야 한다”라는 말로 극우파 정치인들을 저격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점은 2세인 한 회장의 차남 한유 대표이사도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처럼 야구와 인연이 있다. 한유 사장은 고등학교(교토 상고) 3학년이던 1981년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일명 ‘고시엔 대회’)에 출전하며 한국 이름으로 선수 등록을 했다. 당시까지 고시엔 대회 출전 선수는 설령 재일 동포라도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는 게 관례였다. 한유 사장은 아버지처럼 그 관례를 깼다. 교토 상고는 1981년 준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는 일본 법률에 따라 한 사장도 스무 살에 일본 국적을 취득했지만 아버지와 똑같이 한국식 이름을 쓴다. 아버지 뜻에 따라 한유 사장은 수익금의 1%를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기자명 홍상현 (〈게이자이〉 한국 특파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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