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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농구가 아닌 즐기는 농구를 가르친 전규삼

2018년 03월 23일(금) 제548호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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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송도중·고등학교 교사였던 전규삼은 36년 동안 농구부를 맡아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는 선수들이 이기는 농구가 아니라 즐기는 농구를 하도록 이끌었다.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는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정기전의 뿌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각 학교의 전신이라 할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은 주로 축구와 농구에서 격돌하며 실력을 쌓아나갔지. 그러던 중 연희전문 농구단은 1936년 전일본 농구선수권대회 우승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룩한단다. 연희전문 출신의 이성구 등은 일본 농구 대표로 베를린 올림픽까지 출전하는 영광을 누렸어.

한편 보성전문 농구팀은 절치부심하여 한국 농구사의 전설적인 센터 조득준을 앞세우고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전일본 농구선수권대회 3연패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뤄. 나름 일본에서 농구 좀 한다는 팀치고 식민지 조선에서 온 연희전문과 보성전문에게 안 털린 팀이 없었으니 일본 농구팬들은 어지간히 약이 올랐을 거야. 1940년 1월 보성전문 농구팀이 더는 질 수 없다고 악착같이 달려드는 도쿄 문리대를 완파하고 전일본 선수권대회 3연패를 달성한 뒤 보성전문 농구팀이 목이 터져라 부른 ‘보전 농구단가’ 가사는 참 뭉클하다. “삼천리 금수의 강산은 세상에 풍치를 자랑하고 한양에 우뚝 선 보전은 문화와 농구로 빛나네. 이 땅과 이 집서 자라난 보전농구 건아야, 장하다. 우리의 농구단.”

ⓒKBS <우리들의 공교시> 갈무리
송도고등학교를 가드 명문고로 만든 ‘영원한 농구 스승’ 고 전규삼 선생.
해방 이후에도 한국 농구는 많은 스타들을 배출했어. 이 가운데, 선수로는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으나 한국 농구에서 특출하게 영롱한 별로 남은 사람이 하나 있단다. 영화 <라디오 스타>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없어. 별은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야.” 오늘 소개하려는 별은 자신이 빛을 내려 기를 쓰는 별이 아니라 다른 별들이 마음껏 빛나도록 그 빛살을 나눠주는 별이야. 다른 별의 반짝임 뒤에서 흐뭇하게 미소를 그렸던 별. 즉 빛나는 별이라기보다는 따뜻했던 별이라고나 할까.

그의 이름은 전규삼. 평생을 농구와 함께했지만 태극마크는 고사하고 선수로 뛴 적도 없었어.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한국 농구의 찬란한 별들이 그 앞에서 열을 지어 머리를 조아렸단다. 김동광·유희형·이충희·강동희·신기성 등.

그 대부분은 인천 송도중·고등학교 농구부 졸업생이었어. 전규삼은 그 학교 교사였다가 농구가 좋아 농구부를 맡아서 무려 36년을 보낸 사람이야. 그는 ‘코치님’이나 ‘감독님’으로 불리지 않았다고 해. 1953년생인 김동광 또래에게는 ‘아버지’라 불렸고, 그 아래 세대에게는 그냥 ‘할아버지’라고 통칭됐어. 전규삼은 특출한 포인트 가드를 많이 배출했는데 그중의 하나였던 신기성은 이렇게 말하고 있어. “고 전규삼 할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내게 농구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신 분입니다. 그분은 이기는 농구가 아니라 즐기는 농구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신기성이 말한 즐기는 농구란 무엇이었을까. 이건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농구계에서 영구 제명되긴 했으나 한국 농구의 가드 계보에 굵직한 이름을 남긴 강동희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송도중학교에 입학한 후 경기를 지켜보던 강동희는 이 학교 선수가 벌이는 말도 안 되는 플레이에 경악해. 3점 라인 훨씬 밖에서 롱슛을 던져버리는 거야. 자신이 그때까지 배웠던 농구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 그는 곧 이 ‘사태’를 이해하게 돼.

ⓒ연합뉴스
송도고등학교 출신 이충희 선수.
“할아버지는 남들 다 하는 뻔한 농구 말고 창의적인 기술을 익히라고 항상 강조했다. 그래야 농구가 재미있고 실력도 는다고 했다. 실수해도 괜찮으니 남들보다 세 단계 높은 기술을 연마하라고 주문했다. 노룩패스, 훅슛, 비하인드 백드리블 같은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들이 쓰는 기술을 몸에 익히라고 했다. 이러니 경기 중에 3점슛 라인보다 먼 곳에서 훅슛을 날리는 일이 생길 수밖에…(<동아일보> 2012년 6월8일자).” 즉 이기고 지는 승부를 위한 농구가 아니라 재미있는 운동을 시켰다고나 할까. “멋있게 흉내내봐. 재밌잖아!” 그래서였을까 전규삼은 다른 학교에서는 거들떠보지 않을 단신 선수들의 농구에 대한 열망을 오히려 더 눈여겨봤어. 강동희며 김승현 등 한국 농구의 이름난 가드들은 전규삼이 아니었다면 일찌감치 그 빛을 거두고 농구화를 벗었을지도 몰라.

그렇다고 그가 기본을 소홀히 한 것은 절대 아니었어. 한국 농구사상 전설의 슛 도사 이충희는 송도고등학교에 와서 2학년 때까지 게임을 거의 뛰지 못하고 기본 훈련만 받아야 했으니까. 이충희는 농구를 중학교 3학년 때 시작했고, 키 160㎝에 시력은 0.3으로 도무지 농구를 할 몸이 아니었어. 그런 이충희에게 “농구 도사가 되면 골 망이 대문짝만하게 커 보인다”라면서 슛 연습을 하루에 1000개 이상 시킨 사람이 바로 전규삼이었어.

전규삼이 가장 강조한 ‘기본’은 농구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어. 그는 무조건 학생들에게 수업에 들어가게 했고 운동 시작 시간은 항상 수업이 끝난 오후 2시 이후로 잡았어. 신기성의 경우 “농구 못한다고 혼난 적은 없는데 숙제 안 했다고 혼난 기억은 있다”라고 회고하고 있으니 전규삼 할아버지가 어느 정도로 공부 잔소리를 했는지 알겠지.

여기까지는 다른 훌륭한 코치들과 엇비슷할 수 있을 거야. 즐기는 운동, 기본기 강화,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은 꽤 많으니까. 송도고등학교의 ‘농구 할아버지’가 대한민국 체육계의 산마루에 높이 솟아 내뿜는 큰 빛이 하나 있어. 그건 바로 지도자 생활 36년 동안 단 한 번도 제자를 때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야.

ⓒ연합뉴스
송도고등학교 출신 김승현 선수가 경기하는 모습.
36년 지도자 생활 동안 한 번도 구타 없어


선수를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다 보니 코트를 한 바퀴 돌고 있더라는 어느 감독의 회고나 매를 피하려다가 선수들이 2층 숙소에서 뛰어내려 다리를 접질리기도 했다던 어느 감독의 이야기는 유명했다. ‘사랑의 매’를 휘두르고 선후배들끼리도 그게 당연했던, 심지어 21세기 대명천지에서도 구타 사건이 빈발하고 ‘매타작’이 암암리에 횡행하는 우리 체육계 문화에서 그는 완연한 별종이었어.

전규삼 할아버지가 격노하는 경우는 경기에 졌을 때보다는 점프하고 내려오는 상대 선수 발 아래에 다리를 슬쩍 집어넣는 따위의 악의적 반칙을 하거나, 상대방을 가격하는 폭력 행위를 일으켰을 때야. 농구 이전에 사람이 되어야 하며, 같은 팀이든 상대 팀이든 농구를 하는 동료로서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지. 당연히 송도고등학교에서 후배들에게 못되게 구는 선배는 거의 없었어. 그랬다가는 당장 쫓겨나 문 밖에서 울며 사죄해야 했으니까.

승부를 가리는 스포츠이지만 이기기 위한 운동보다는 즐기는 운동을 북돋웠고 ‘기본’을 놓치지 않되 학생으로서,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기도 가르쳤던 송도고등학교 농구팀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 전규삼은 평생을 그렇게 농구공과 제자들과 함께하다가 2003년 5월8일 어버이날 세상을 떠났어. 옛 스승의 영전에 줄줄이 늘어선 한국 농구의 별들은 눈물 속에 머리를 숙였단다. 그들의 추모사 한 구절을 빌려와 본다. “좋은 학벌과 해박한 지식, 높은 철학, 성실하신 자세 등을 지니셨기에 다른 사람들처럼 세상적인 영광의 길을 추구하셨더라면 더 화려한 위치에 서실 수도 있었던 선생님. 그러나 때로는 무보수로, 때로는 임시직으로의 척박한 가시밭길을 걸으시면서도 오로지 농구 지도자로 만족하셨던 고마우신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가장 위대하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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