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고 침실에 들어와 눕기 전 30분 타이머를 맞춘다. 적어도 하루 30분쯤은 책 읽기에 시간을 쓰고 싶어서 지난해부터 들인 습관이다. 모바일 안에서는 재밌는 일이 초 단위로 벌어지고, 집 안에는 놀아달라고 날뛰는 청소년 고양이가 있지만 ‘고작 30분’이라고 생각하며 유혹을 견딘다.

〈다른 사람〉을 집어든 날도 그런 밤이었다. 호평이 자자한 책이었지만 읽기까지 오래 망설였다. 표지 뒷면의 추천사를 먼저 살펴봤던 탓이다. 추천사를 훑어보니, “강간당하느니 차라리 강간하는 인간이 되고 말겠다”라는 문장이 소설에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 문장에 압도당했고, 그 마음을 직면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 적의를 이해할 수 있는 무수한 사람 중 한 명이니까.

1년 가까이 이 책을 눈에 걸리는 곳에 두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끝에 겨우 첫 장을 열 수 있었다. 미투 운동이 시작될 무렵이었고, 더는 이 책을 미룰 수 없겠다는 이상한 예감 때문이었다. 마침내 30분이 지나고도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우리는 여자애들이었”으므로. “해도 되는 것보다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더 많이 배운 여자애들. 된다는 말보다 안 된다는 말을 더 많이 듣고 자란 여자애들(59쪽)”이 나였으므로. “비슷한 일을 당한 여자들은 대체 어디서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203쪽)” 고민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니까.

소설 속 유리의 일기장은 현실의 미투 운동이 어느 날 갑자기 터져 나온 ‘문제’가 아님을 증명한다. 데이트 폭력 생존자인 진아는 학내 성폭력 고발자인 이영에게 “여자들의 증언으로 얻을 수 있을지 모를 몇 가지 가능성에 대해, 그리고 그 가능성을 보고 용기를 내 나타날지 모르는 또 다른 여자들에 대해(332쪽)”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고 ‘그 일’은 어디서나 벌어진다. 마지막 문장은 마땅히 가해자의 것이다. 끝없는 이야기이자 끝장내야 할 이야기, “이제는 네 차례다”(334쪽).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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