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과 절제는 인류가 오랫동안 고심해온 주제 중 하나이다. 인간은 어째서 당장의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나중에 드러난다면 평생 쌓아온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르는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는 걸까. 고대 그리스인은 이 문제를 매우 세련된 방식으로 통찰했다. 위대한 시인 호메로스의 작품 〈일리아드〉 〈오디세이〉에는 전장을 누비는 영웅도 사실은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심지어 신조차도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예사로 간통을 저지르고 복수하며 망신을 준다.

〈일리아드〉가 충동을 다루었다면 〈오디세이〉는 절제를 말한다. 그렇다고 오디세이가 목석은 아니었다. 공명심을 앞세우다가 위기를 맞았고 매력 있는 여성의 손짓에 기꺼이 무릎을 꿇었다. 10년에 걸친 오랜 여정 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깡그리 객사한 일행과 그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디세이는 쾌락을 마다하지는 않았지만 물러설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필요할 때마다 그의 자제심은 부족함이 없었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했던가. 자신을 숭배하는 수많은 아름다운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스캔들 한번 없었던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란 대부분 스스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선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누군가 그런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충분한 지식이 없어서거나 외부 요인이 있어서라고 설명했다. 본의는 아니겠지만 그의 주장은, 성폭력을 될 수 있으면 상대의 유혹이나 질병 탓으로 몰아가고 싶어 하는 요즘의 가해자 쪽 변호사의 입장과 맞닿아 있다. 또한 호르몬 변화나 어린 시절 경험, 포도당, 도시 생활 등 자기 절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외부 요인을 규명하고자 하는 과학자들을 격려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한성원 그림
충동과 자제력을 둘러싼 토론에 관한 한 아리스토텔레스야말로 강자 중의 강자이다. 그는 “나는 적을 정복하는 사람보다 스스로를 극복하는 사람이 더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 가장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과잉 못지않게 결핍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다. 욕망의 결핍은 발전을 추동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중독이 질병일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따랐다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되 면죄부는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아름다움을 비율과 조화에서 찾았던 그리스인의 성향과 연관된다.

그리스 시대로부터 2000년 넘게 지났지만 충동과 자제는 여전히 골치 아픈 논쟁거리이다. 최근 과학은 인간이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수많은 실험 결과는 우리가 어떤 일을 왜 하는지 잘 알지 못하며, 행동의 규제가 의식의 통제 밖에 있는 다양한 요소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인간은 유전자의 신호에 반응하는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고 믿는 과학자들이 점점 늘어나는 형편이다. 가해자 쪽 변호사들은 유전학·신경학·심리학이란 끌과 망치를 휘두르며 개인의 책임이라는 건물을 부수느라 여념이 없다.

게다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돈과 권세가 있는 명망가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마저 자제심을 발휘하기 힘들게 몰아세우는 중이다. 세계화로 획일화되어가는 이 행성은 성적 충동뿐만 아니라 마약·담배·술·도박 등을 거의 무한 리필하는 뷔페나 다름없다. 미국이나 유럽의 명망가들은 순간의 충동에 못 이겨 패가망신하는 일을 겪지 않으려고 경호원까지 고용하는 지경이다. 마약이나 부적절한 이성 관계에 빠지지 않도록 본인이 이성을 잃고 해고 위협을 가하더라도 나중에 문제가 될 행동을 절대 하지 않도록 철저히 막아달라는 계약을 맺는 것이다. 술에 취해 전화를 걸어서는 안 될 사람과 시간대에 전화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는 앱도 인기를 끌었다. 최근의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나 연극연출가 이윤택씨 등의 사례에 비춰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조만간 이런 사업이 번창하지 말라는 법이 없겠다.

미국에서는 자발적으로 음식물 섭취량을 조절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매년 20만명이 넘는 사람이 위 절제 수술을 받는다. 흡연, 나쁜 식습관, 과음, 위험한 성관계 탓에 해마다 100만명이 넘게 사망하는데 이는 전체 사망자의 절반에 육박한다. 이는 미국식 소비 방식을 받아들인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통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세계는 지금 충동과의 전쟁이라는, 앞의 두 차례 세계대전보다도 훨씬 사상자 수가 많은 비극을 겪는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인 사망자 수는 40만명에 ‘불과’했다. 인류는 충동이 과연 자기 탓인지 의문을 갖기에 앞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자기 절제력을 기르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할 처지이다.

인간의 충동과 절제에 대한 견해는 여러 갈래지만 그 전제는 다 같다. 인간은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유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마따나 우주의 끝이 어딘지는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 욕심의 한계는 알기 힘들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런 상식에 반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충동 조절에 실패해 쩔쩔매는 기성세대가 무색하게도 젊은 세대 가운데는 수도사 같은 이들이 늘어간다. 그들은 부모 세대에 비해 술·담배·마약· 섹스 따위에 덜 이끌린다. 이들에게 ‘무엇인가’가 일어난 게 분명하다. 예전의 청소년, 즉 나 같은 사람에게는 담배·술·설탕이 최고였다면 지금은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미국에서 네덜란드, 칠레, 한국에 이르기까지 주로 먹고살 만한 나라들에서 이런 흐름은 일관된다. 그리고 그 흐름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급격히 빨라졌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아이들이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처음 술을 입에 대는 나이도 늦어지고 있다. 유럽에서 술 잘 마시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영국의 16~24세 젊은이 중 5분의 1이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술꾼의 메카였던 펍이 매년 1000개씩 사라진다. 젊은이를 상대로 한 나이트클럽의 형편은 더욱 좋지 않다. 평일 밤 11시만 돼도 셔터를 내려야 할 지경이다. 2003~2015년 스웨덴에서는 금주자가 11%에서 31%로, 아이슬란드에서는 23%에서 61%로 늘어났다. 유럽 약물감시센터에 따르면 1999년 이후 10대의 술·담배·마리화나· 흡입제·진정제 같은 ‘기분전환물’ 소비가 눈에 띄게 줄었다. 예전처럼 서로 나쁜 영향을 주고받지도 않는다. 주먹질과 반사회적 행동도 현저히 줄었다. 유럽 전역에 청소년이 2007년에 3000여 명이 수감돼 있었으나 지금은 1000명 이하로 줄었다.

술·담배 같은 나쁜 쪽에 손을 뻗지 않는데도 행복해 보이지 않아

젊은이들은 섹스도 잘 하지 않는다. 미국의 20~24세 중 18세 이래 섹스 파트너가 없었던 비율이 15.2%에 달한다. 1960년대 중반에 태어난 이들은 그맘때 6.3%만이 섹스 파트너가 없었다. 일본의 경우 극단적이다. 2002년 미혼 남성 중 섹스를 한 번도 안 한 비율이 34%에서 2015년 47%로 늘어났다. 미국과 유럽의 젊은이들은 한때 전 세계가 신기하게 봤던 일본이나 한국의 ‘오타쿠’들을 점점 닮아간다.

정확한 원인을 알아내려면 아직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우선 아이들은 겁에 질렸을 수 있다. 청년 실업률의 증가와 함께 OECD 국가 청소년 중에는 장래에 결국 홈리스가 되고 말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리는 비율이 늘어간다. 그들은 자신이 친구들뿐만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나 로봇과의 경쟁으로까지 내몰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가방 끈을 늘리는 데 시간을 많이 쓸 수밖에 없다. OECD 국가에서 2000~2016년 24~34세 학사 학위 이상 소지자가 26%에서 43%로 증가했다. 반면 방학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인원은 현저하게 줄었다.

부모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점도 무시하지 못한다. 특히 아버지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최근 세계보건기구(WHO) 조사에 따르면 부자 나라 34개국 가운데 29개국에서 아버지와 말이 잘 통한다는 자녀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 부모와 소통을 하든 안 하든 아이들은 가정에서 고분고분해지고 있다. 부모가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기술은 감시망을 촘촘하게 만들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문자를 검색하고 어디 있느냐고 언제라도 물을 수 있다. 지금은 세계의 어떤 오지로 캠프 여행을 가더라도 수시로 부모와 화상통화를 할 수 있다.

아이들은 거의 100% 과도한 스마트폰·소셜 미디어 유저이다. 201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15세는 하루 평균 146분 동안 온라인에서 살았다. 그보다 겨우 3년 전인 2012년에는 105분이었다. 최장 시간을 기록한 칠레 아이들은 주말에 거의 4시간, 230분을 인터넷과 씨름했다. 많은 이들이 스마트폰이나 소셜 미디어가 아이들이 다른 여러 가지 실체에 관심을 갖지 않도록 만드는 주범이 아닌지 의심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지나친 사용이 아침을 거르거나 그 전날 잠을 설치는 것보다 아이들의 삶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도 아직은 단언할 수 없다.

아이들은 술·담배나 마약처럼 나쁜 쪽에 손을 뻗지 않는데도 예전보다 행복한 것 같지는 않다. 아이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더 외로워졌다고 호소한다. OECD의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 따르면 거의 모든 나라에서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는 비율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예전에는 ‘정상’이었던 스웨덴이나 독일마저 한국(20% 남짓)을 추월해 일본(30% 남짓)에 육박해가는 중이다. 아이들은 온라인을 통해 욕설·가십·야동은 교환하지만 예전 세대처럼 직접 체액과 주먹·담배·소주는 나누지 못해 불행한 걸까. 아이들은 의학의 발전과 수명의 연장에 반응해 욕망을 충족하는 속도도 늦춘 것일까. 우리는 욕구를 손쉽게 뒤로 미룰 수 있는 중요한 진화의 한 단계를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들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시간 재벌이 아니던가.

참고한 활자:〈자기 절제 사회〉(민음사), 〈이코노미스트〉 〈워싱턴포스트〉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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