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을 타던’ A와 B는 밀폐된 공간에서 영화를 본다. 둘은 어느 순간 애무를 시작하지만 더 이상은 원하지 않았던 A가 “이제 그만하고 영화나 보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B는 멈추지 않는다.

이건 강간일까, 섹스일까? 이 질문에 즉시 “그건 강간이야!”라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미줄라〉를 꼭 읽어보기 바란다. 나만 해도 이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여전히 위 질문에 제대로 답을 내지 못했을 거다. “A도 원했던 거 아냐?” 하는 반문에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른다.

존 크라카우어 지음, 전미영 옮김, 원더박스 펴냄

위 사례는 책에 나오는 세실리아 워시번(가명)과 조던 존슨의 사건을 단순화한 것이다. 이 외에도 책에는 몇 가지 성폭행 사건이 더 소개된다. 미국 몬태나 주 미줄라 시에 있는 몬태나 대학교에서 벌어진 사건들이다. 책 제목이 〈미줄라〉인 이유다. 책은 단지 이 도시의 성폭행 사건을 폭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몬태나 대학교 성폭행 사건과 사법 시스템에 관한 르포르타주’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사법 시스템을 비중 있게 다룬다. 

저자는 우연히 알게 된 지인의 성폭행 피해 사실을 접하고, 그간의 무지를 반성하며 성폭행 문제를 취재해나간다. 그는 강간이 생각보다 훨씬 자주 발생하는 범죄지만 신고되는 비율은 현저히 낮고(피해 여성 80% 이상이 신고하지 않는다), 신고된 사건의 극히 일부만 기소되며(기소율 0.4~5.4%), 거기서도 일부만 유죄 판결(실형 선고 비율 0.2~2.8%)을 받는 현실에 주목해 이 문제를 파고든다.

“왜 많은 성폭행 피해자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까?” 머리말에서 제기한 저자의 질문은,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 정도 답을 구할 수 있다. 피해자를 옭죄는 주변 시선과 사법 시스템의 문제를 담담하지만 서늘하게 펼쳐 보인다. 이 책을 읽는 동안 ‘피해자 말하기’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도 깨닫게 될 것이다.

기자명 정회엽 (원더박스 기획팀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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