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사람들은 우주를 생각했다. 지난 4월2일 월요일 아침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하늘, 아니 우주를 한 번씩 올려다보았다. 며칠 전부터 중국의 실험용 우주정거장 ‘톈궁 1호’가 지구 대기권으로 진입해 지상이나 바다에 추락할 것이라는 경고가 울려왔다. 길이 10.5m, 무게 8.5t의 고장난 인공 우주 물체가 추락할 확률이 있는 예상 지점 가운데 한반도도 포함돼 있었다. 4월2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톈궁 1호가 오전 8시47~54분께 우리나라 상공을 지날 것으로 예측된다”라며 이 시간에 외출과 외부 활동을 자제해달라고 당부했다. 다행히 그날 톈궁 1호는 남태평양 칠레 앞바다에 떨어졌다.

10년 전에도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우주에 대해 생각하던 날이 있었다. 2008년 4월8일 한국인 최초 우주인 이소연 박사가 탑승한 소유즈 TMA-12호가 우주로 발사되던 날이었다. “5, 4, 3, 2, 1, 발사!” 서울시청 앞 광장에 시민 5000여 명이 모여 함께 카운트다운을 외쳤다. 생중계 화면에 뜬 ‘발사 성공’ 네 글자를 보고 시민들은 함성을 질렀다. 이틀 뒤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도착한 이 박사가 방송을 통해 전한 목소리는 1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우주입니다.”

ⓒ시사IN 이명익이소연 박사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2년간의 의무 복무 기한을 끝내고 미국으로 건너가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밟았다.
우주에서 최초로 한국어 인사를 전하던 이소연 박사는 그 당시 카이스트 대학원생이었다. 2006년 과학기술부가 추진한 우주인 선발 대회에서 3만6206명의 경쟁자 가운데 최종 1인으로 남은 사람이었다. 2008년 4월8일 우주선에 오른 그녀는 9박10일간 ISS에 머물며 18가지 우주과학 실험 등 대한민국이 부여한 임무를 마치고 2008년 4월19일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이후 10년 동안 ‘한국 최초 우주인’ 타이틀은 이 박사에게 영광이자 굴레였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에 재직하며 우주과학 기술 강연·홍보 활동을 이어가던 이 박사는 2012년 8월 미국으로 건너가 UC 버클리 경영전문석사(MBA) 과정을 밟았다. 현재 미국의 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실리콘밸리의 인공위성 스타트업에서 국제협력 업무를 맡고 있다. 이 박사는 기대와 환호만큼이나 많은 인신공격과 비난을 받았다. 선발 당시 많은 사람들은 ‘한낱 여자 한 명에게 수백억원의 예산을 쓴다’라며 혀를 찼고, 이 박사가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동포 출신과 결혼한 이후에는 ‘나라를 배신하고 외국에서 시집이나 갔다’라며 손가락질했다. 최근 ‘우주인 이소연, 국적 포기’라는 허위 보도가 나, 언론중재위원회 제소로 대응하기도 했다.

‘먹튀 논란’ ‘260억원짜리 우주 관광’ 같은 자극적인 기사들에 가려 미처 다 전해지지 못한 우주 이야기를 이소연 박사는 〈시사IN〉을 통해 알리고 싶어 했다. 인터뷰는 4월2일과 4월4일 두 차례 진행됐다. 지구인들이 로켓이 발사되고 우주 물체가 추락하고 달이 해를 가리는 등의 이벤트가 있을 때만 실감하는 ‘우주’를, 또 그 우주를 다녀온 ‘한국 최초 우주인’이라는 자신의 타이틀을, 이 박사는 10년 내내 고민하고 탐구해 나가고 있었다.

ⓒSBS 제공2008년 4월11일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지구와 교신하는 이소연 박사(가운데)의 모습. 그는 9박10일간 우주에 머물렀다.
10년 전 우주를 다시 떠올리면?우주에 가서 지구를 내려다보니 나라는 사람 하나가 몹시 하찮은 존재 같기도 하고, 그런 내가 여기 우주까지 나와서 지구를 내려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데 굉장히 감사하기도 했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 90분이 걸린다. 그중 미국, 러시아는 거의 10분이 걸리는 데 비해 한국을 지나는 건 채 몇 분이 안 걸렸다. 상대적인 사이즈가 확 느껴졌다. 그런데 그 작은 한국에 대해 실망감이 아니라 오히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내가 어떻게 여기 우주까지 왔을까, 또 저 작은 나라가 갖고 있는 역량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생중계 화면을 보면 매우 즐겁고 밝은 표정인데 실제 그 안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사실 힘들었다. 매일 멀미하고 머리 아프고 허리 아프고 어지러웠다. 하지만 모든 우주인의 가장 큰 의무감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아이들이다. 우주에서 날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가장 관심 있게 볼 사람들은 아이들이다. 미국 나사(NASA)에서 엄청난 일을 한 과학자 대부분이, 어릴 때 봤던 닐 암스트롱이 달에 내릴 때의 흥분을 잊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나를 보고 그 기억을 붙잡고 공부하고 과학기술을 이끌어나갈 미래 세대가 나한테는 가장 큰 관심사이고, 의무와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다.당시 우주에서 한 18가지 실험은 이후 어떻게 활용됐나?이후 2~3년 정도 실험을 주관하고 설계한 분들이 결과 분석도 하고 후속 연구 계획도 세운 걸로 안다. 언론 노출이 안 되었을 뿐이지 관심을 가지고 지속하는 분들이 분명 있었다. 내 비행 이후 한국마이크로중력학회라는 연구단체도 생겼다. 사실 연구자들은 무중력이라는 말을 잘 안 쓴다. 우주정거장도 마이크로 그래비티(micro gravity·미소 중력) 상태이다. 0.000000001이라도 중력이 있으면 무중력이 아니다. 그런 곳에서 수행한 18가지 실험이 마이크로 중력 연구였기 때문에 그때부터 발족하고 관련 연구가 이어진 것이다.후속 연구 예산을 따러 다닐 때 힘들었다는 이야기도 했다.행정적으로 3년짜리 단기 사업으로서, 실험 의뢰를 받은 우주인이 우주에 가서 실험을 대행하고 데이터를 가져오면 끝인 계획이었다. 실험을 의뢰한 다른 기관 처지에서는 후속으로 분석하고 계획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기반이 없는 경우에 항우연에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이씨는 지난 3월 〈에피〉 인터뷰에서 “귀환해서 우주인 사업이 3년짜리 단기 사업이고 후속 계획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무척 허탈했다. 심지어 우주정거장에서 갖고 온 실험 결과를 분석하는 예산을 어떻게든 확보하기 위해, 또 우주과학 팀이 뭐라도 할 수 있게끔 예산을 따러 돌아다닐 때는 정말 우울했다”라고 말했다). 항우연은 ‘우리도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하고, 그 가운데 낀 입장에서 되게 미안했다. 항우연도 나름대로 당시 처한 상황에서 최대한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이 부족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상황이 힘든 것에 대한 철없는 저의 볼멘소리였다.

ⓒ연합뉴스2009년 국제우주대회(IAC) 홍보대사 이소연 박사가 우주소년단 어린이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후속 사업이나 예산이 미진한 부분을 몸소 실감한 것이 MBA 과정을 밟은 계기가 되었나?그렇다. 해외에서는 민간 주도 과학기술이 정부 주도보다 훨씬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행된다. 한국도 기업 역량이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에 조만간 민간 주도의 과학기술이 발전할 것으로 예상했다. 기업 쪽 경영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면서 과학기술계를 대변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유학을 갔다.실제 공부해보니 어떻던가?너무 힘들더라(웃음). 120명 중 119명이 학부 때부터 경영학을 전공했다. 나는 15년 동안 과학기술만 공부하던 사람이었다. 대학교 수업에 중학생이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첫 학기에는 학사경고를 받았다. 놀면서 그랬으면 덜 억울할 텐데, 수업 한 번도 안 빠지고 7년 동안 악으로 깡으로 모은 전 재산을 등록금에 올인해서 내겐 피 같은 공부였다. 학사경고를 받았는데도 ‘와, 나는 이 이상 잘할 수가 없는데’ 싶어서 화도 안 나더라(웃음). 그렇게 2년간 공부하며 졸업하고 얻은 건 경영하는 사람은 따로 있구나, 경영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니구나, 이 사람들이 공학도들 등골 뽑아먹을 생각만 하는 줄 알았더니 그들 나름대로 어려움과 생각이 있구나, 그걸 공학하는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면 되겠구나, 경영하는 사람들하고 친구도 할 수 있구나 등의 깨달음이었다. 지식보다는 그런 경험이나 이해를 더 많이 얻었다.10년 전 참여한 우주인 사업에서 어떤 점이 가장 아쉬웠나?사실 잘했든 못했든 나를 우주에 가게 해준 건 대한민국 정부였고 이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우주인 사업을 처음 시작한 정부와 그 우주인을 실제 우주로 보내고 갔다 와서 활동할 때 정부가 달랐다. 그 사이 간극은 누군가 한 사람, 한 기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지난 10년 동안 많은 비난을 들었다.의도 없이 한 이야기가 의도가 생겨나고, 트위터 두 줄도 뉴스가 되고, 국회의원 비례대표 후보 이야기까지 나오니까 정말 무서웠다. ‘먹튀’, 국적 논란 같은 것도 기자들은 사실을 모를 리 없는데, 혹은 확인하면 바로 알 수 있는데 사실을 왜곡해 자극적인 기사를 쓰는 게 서운하기도 했다. 트라우마가 생기고 어느 순간부터는 누가 어디 기자, 어디 신문사라고만 해도 무섭고 식은땀이 났다.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싫어하는데 내가 무슨 강연을 하고 공인으로서 삶을 살아야 하나 싶기도 했다. 자살까지 선택하는 유명인 이야기가 남 일 같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잠시 한국을 떠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이 멈추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내가 건강하고 정상이어야 대한민국에 봉사할 수 있으니까.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런데 또 그런 것도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나. 그 자리에서 나오든지 적응을 하든지. ‘최초 우주인’ 자리는 그만둔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 ‘현재에 적응하고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자, 내 선에서 해결 못하는 건 그냥 두자’고 생각했다. 화성 생존기와 지구 귀환을 다룬 영화 〈마션〉을 보면 맷 데이먼이 자기가 살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다만 죽는 그 순간까지 살아보려고 노력할 뿐이지. 그걸 보면서 내 모습을 많이 생각했다. 속상해하기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MBA를 마친 뒤 어떻게 지냈나?대학에서 시간강사로도 뛰고, 과학 자문도 하고, 어린이들 프로그램도 했다. 왜 한국에서 안 하냐고 하는데 한국은 우주인으로서 얼굴이 알려져 할 수 있는 일에 정작 제한을 받았다. 사진 찍고, 행사하고. 나 역시 일정에 쫓기다 보니까 눈에 보이는 일에만 집중했지 콘텐츠를 쌓는 일이 잘 안 생겼다. 미국에 와서는 그저 공학박사이고 MBA를 한 사람으로서 좀 더 현실적인 일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화려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 만날 때보다 훨씬 더 실질적이었다. 미국에서는 자연스럽게 약자가 되고 또 약자를 도와주는 입장이 되다 보니 한국에서 볼 수 없는 것들 혹은 한국에 있지만 제가 잘 못 보던 것들을 보았다. 한국에 있을 땐 ‘과포자(과학 포기자)’ ‘수포자(수학 포기자)’가 그렇게 많은데 사실 내 주변에는 공학박사들뿐이었다. 그런데 미국 지방의 작은 학교에서 어려운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한국에서는 이런 아이들을 어떻게 돕고 가르칠 수 있을까, 이 경험을 한국에 가서 어떻게 적용할까를 매일 강의하고 운전해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한다. 현재 인공위성 서비스 스타트업 ‘로프트 오비털’에도 몸담고 있다.이제 세계는 우주 기술 없이 그 무엇도 할 수 없는데, 인공위성을 갖고 운용하는 데에는 너무 큰 비용이 든다. 그 때문에 세계 열 몇 개 나라 빼고 나머지 나라들은 엄두도 못 낸다. 차를 살 돈이 없는 사람이 필요할 때 택시를 타거나 공유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처럼, 로프트 오비털은 인공위성이 필요하지만 개발하고 발사하고 운용할 여유가 없는 나라에 데이터를 빌려주거나, 대행해주기도 한다.우주의 ‘공유경제’ 사업인가?맞다. ‘인공위성 우버’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 스타트업에서 내가 맡은 일은 국제협력이다. 전 세계 우주 관련 전문가 네트워크를 활용해 고객이나 자문가를 찾을 때 조언해주고 사람을 소개해주는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우주 관련 스타트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궁금했고 그걸 알아야 한국과 어떻게 연결하고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색할 텐데, 미국 스타트업에서의 경험이 도움 되지 않을까 하고 배우는 중이다.국내에도 우주 관련 스타트업이 활발한가?우리별 1호를 주도했던 쎄트렉아이라는 민간 기업이 그나마 규모가 크고 알려진 곳이고, 나머지는 규모가 작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나도 사실 이번에 들어와서 이런저런 회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심지어 그 친구들이 어렸을 때 내가 우주에 가는 걸 보고 영감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어릴 때는 아이들이 분명 우주에 관심이 많은데 오히려 크면서 점점 멀어진다.영화나 애니메이션은 잊어버리기 쉽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구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것이구나 하고. 그런데 다큐멘터리나 실제 일어난 일을 본 기억은 강렬하다. 가까운 친구들 중에 어렸을 때 우리별 1호를 보고 ‘나도 저런 거 하고 싶다, 원래 한국 사람은 못할 줄 알았는데 한국 박사님들이 다 해버리네? 그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얘기네?’라고 생각해 과학자가 된 경우가 많다. 나를 보고도, ‘우주에서 뭘 하는 사람은 항상 다 키 큰 백인들뿐이었는데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우주에서 저렇게 떠다니는 걸 보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얘기네?’ 이렇게 현실성 있게 다가가지 않았겠나. 그런 점에서 모든 논란을 뒤로하고, 나는 우주에 갔다 온 것에 감사하고 보람을 느낄 수밖에 없다. 누가 뭐라 하든 나를 바라본 초등학생이 꿈을 꾸는 것을 막을 순 없으니까. 그런 것들이 어쩌면 그 많은 어려움과 논란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미국에 나가 있을 동안 한국도 큰 변화를 겪었다. 바깥에서 어떻게 봤나?

한국의 많은 변혁과 안타까운 일을 지켜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에 한없는 미안함도 느꼈다. 2016년 광화문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촛불을 들 때는 나도 같이 걷고 숨 쉬고 함께 울고 함께하고 싶었다. 친구들 페이스북으로 라이브를 보다가 한번은 기발한 깃발 만드는 게 유행이기에 나도 깃발을 하나 디자인했다. 우주인연합회 시애틀지부 깃발(웃음). 친구들한테 ‘야, 이거 좀 들고 나가줘’라고 했다. 아는 선배가 정말 들고 나가줬다.

과학기술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대한민국의 희망이 보인다는 생각을 했나?

그렇다. 할 수밖에 없다. 어떤 분은 ‘이번 정부는 인권에는 관심이 많은데 과학기술에는 관심 없는 것 같다’라고 하던데, 일단 사람이 좀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나. 나도 과학과 우주에 정부와 국민의 관심이 많아졌으면 좋겠지만 일단은 바다 속으로 사라진 아이들과 그 부모들 마음부터 위로하는 게 로켓 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남북한 대립 상황에서 전쟁이 날까 불안한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야 로켓도 만들고 위성도 쏠 것 아니냐. 내게는 이게 최고이지만 우리 모두에게 과연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일까. 가끔 우리 각자가 너무 이기적일 때가 있는 것 같다. 이런 생각도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볼 때부터 시작됐다. 내가 저기로부터 왔는데, 내가 온 지구가 남이 된 순간. 유체이탈 같은 기분.

10년 전 우주에서 한 “언젠가 대한민국도 우주 강국이 되어서 각자 맡은 일을 우주에서도 수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우주에 나와 있는 나나, 지구에 있는 당신이나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라는 뜻으로 들렸다.맞다. ‘내가 우주에 있으면 당신이 온 것과 같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지구에 귀환한 뒤, 시청 앞 광장에 모여 내가 우주로 날아가던 순간을 마음 졸이며 지켜보던 사람들을 보고 ‘내가 뭐라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소연이 아니라 대한민국 최초 우주인이 우주를 간 것이었다. 내가 국민을 대표해 우주에 간 것이고 그래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보답하기 위해 지금 열심히 갈고 닦고 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조금 기다려달라고 부탁드리고 싶다.

이소연 박사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4년 동안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으로서 500회를 넘는 강연, 전시, 대중매체 홍보 활동을 했다. 그때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건 주로 우주인이 배출되기까지의 ‘성공’ 스토리였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뒤 이 박사는 우리에게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대한민국 우주 개발 및 과학기술의 ‘성장’ 스토리를 들려주고 있다. 그녀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같이 만들어가야 할 이 이야기의 결말은 아직 나지 않았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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