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 나오는 일화야. 관우를 죽인 뒤 성난 유비의 공격에 직면한 오나라 주인 손권은 위나라의 황제 조비에게 사신을 보내 동맹을 청한다. 사신은 조자(趙咨)라는 사람이었어. 조자의 목적을 훤히 알고 있던 위나라 황제 조비는 위협적인 말을 던져. “만약 짐이 오나라를 치려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자 조자는 이렇게 맞받아. “큰 나라에는 작은 나라를 정복하는 무력이 있고, 작은 나라에는 큰 나라를 막는 방책이 있는 법입니다.”

실로 명답이 아닐까. 너희는 큰 나라, 우리는 작은 나라라고 인정하는 것 같지만 결코 비굴하게 굴지 않고 힘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잖아. 그런데 이는 우리 조상들이 대륙의 패권자에게 해왔던, 그리고 할 수 있었던, 해야 했는데 하지 못했던 말이기도 해. 남북 정상회담부터 북·미 정상회담까지 세계사적으로 격변이 될 사건들을 앞두고 우리는 조자 이상으로 ‘작은 나라의 큰 방책’을 세워나가야 할 때가 아닌가 싶구나. 그런 뜻에서 우리 역사 속에서 덩치 큰 나라들을 상대하며 숨 가쁜 담판을 펼친 이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

삼국시대. 7세기 중엽의 신라는 크나큰 위기를 맞았어. 백제 의자왕의 파상 공세가 계속됐고 급기야 642년 신라의 최대 요충 대야성이 함락되지. 이 성을 지키던 김춘추의 사위와 딸도 목숨을 잃었고.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의 모습이 〈삼국사기〉에 묘사되어 있단다. “기둥에 기대서서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앞에 사람이나 무엇이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던 김춘추는 분연히 부르짖어. “사내로 태어나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

ⓒ연합뉴스고구려와 백제, 왜에 포위되었을 때 김춘추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신라를 구했다.
사진은 경주에 있는 태종무열왕릉(김춘추 묘).

그러나 백제 이전에 신라가 망할 상황이었어. 일단 신라의 급선무는 적을 하나로 줄이는 일이었어. 오늘날 미국 같은 초강대국도 두 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걸 금기로 꼽지만, 고구려와 백제가 손잡고 신라를 들이치면 대책이 없었거든. 김춘추는 적국이라 할 고구려로 뛰어들었어. 김춘추의 구상은 이랬을 거야. “통일을 이룬 당나라는 분명히 고구려를 위협한다. 그러니 남쪽에 신경 쓰지 말고 당나라 쪽 방비에 전념하라.” 어쩌면 신라의 영걸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백제로부터 가로챌 즈음, 고구려를 두고 했던 얘기를 다시 써먹었을지도 몰라.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고구려가 망하기를 바라겠는가(〈삼국유사〉).” 즉, 우리는 고구려 당신들에게는 볼 일이 없으니 백제와 우리가 지지고 볶게 내버려두라는 메시지였지. 그러나 국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은 고구려의 실력자 연개소문은 한때 북한을 압박하던 미국의 네오콘처럼 김춘추를 몰아붙여. “죽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면 그렇게 하지요.”

이건 수백 년 전 신라가 고구려의 보호국 비슷했던 시절로 돌아가라는 얘기였어. 임기환 교수(서울교대 사회교육과)는 연개소문이 이토록 무리한 요구를 한 건 “평양성까지 찾아온 김춘추를 다그쳐 협상의 대가로 손쉽게 한강 유역을 되돌려 받을 수 있다면, 자신의 정치적 지위가 상당히 안정되리라는 판단을 했을 것”이라 추정해. 연개소문은 김춘추의 감금에 분노한 신라 김유신의 정예부대가 고구려로 진군해오자 김춘추를 돌려보냄으로써 실리도 명분도 챙기지 못하고 말았어.

연개소문의 생각을 확인한 김춘추는 이번엔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소가(蘇我) 가문이 몰락했거든. 백제는 툭하면 일본군을 용병 쓰듯 한반도 분쟁에 끌어들였고 소가 가문은 백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어. 그런 소가 가문의 몰락을 틈타 김춘추는 일본의 백제 지원을 차단해볼 생각이었겠지. 마치 북한과 특수 관계인 중국에 가서 북한 제재를 설득해야 하는 한국 외교관처럼. 백제와 일본은 “얼굴이 잘생기고 말을 참 잘하는(〈일본서기〉)” 김춘추로서도 흔들 수 없는 관계였어. 고구려와 백제, 왜에 포위된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김춘추는 당나라로 간단다.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김춘추가 우선적으로 한 일은 당나라의 교육기관 국학(國學)을 방문하는 거였지. 당나라 문물에 관심을 보임으로써 그 자존심을 세워주는 한편, 당나라 제도와 통치 이념을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거야. 김춘추는 한 술 더 떠서 “공자 석전대제(釋奠大祭) 의례를 보겠나이다” 하면서 유교적 교양을 과시해 당 태종을 흐뭇하게 해. 그게 왜 흐뭇한 일이냐고? 중세 유럽에서 로마 교황 앞에 나타난 변방의 한 지도자가 성경을 줄줄 읊어대는 풍경을 상상해보렴.

ⓒ연합뉴스경주 통일전에 봉안된 신라 태종무열왕 영정.
‘사대주의 병균을 퍼뜨린’ 민족의 배신자?

나아가 김춘추는 신라의 독자적 연호를 폐기하고, 의복까지 당나라 것으로 바꾸겠다고 약속했어. 단재 신채호가 “사대주의의 병균을 퍼뜨렸다”라고 비난하는 대목이지. 그래서 김춘추를 민족의 배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 정작 김춘추는 이렇게 말하며 어이없어 할 일이지만. “천 년 뒤 민족인지 뭔지를 위해서 신라가 멸망해야 했단 말이냐?”

신라는 멸망하지 않기 위해 더한 일도 감행해. 진덕여왕이 당나라와 고종 황제를 찬양하는 시를 짓고 몸소 비단에 수를 놓아 보낸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이 대표적이지. 눈 뜨고 보기 힘든 아부의 극치라 소개하기조차 민망하다만 아빠는 태평송을 아들 손에 들려 당나라로 보내는 김춘추의 눈빛은 결코 비굴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그건 절박함이었어. 태평송을 보내던 무렵, 백제는 물론 고구려까지 나서서 신라의 30개 성을 깨뜨리고 있었거든.

신라와 김춘추의 도박은 성공했지. 당나라와 군사동맹에 따라 백제 원정군이 결성되고 13만명의 대병력이 한반도에 상륙하게 된 거니까. 누가 뭐라고 하든 이건 ‘생존’이라는 지상 과제에 전력을 쏟았던 김춘추의 승리였어. 삼국시대를 다룬 영화 〈황산벌〉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 실제로 김춘추가 고구려 수군을 피해 도망가면서, 험한 바닷길에 죽을 뻔하면서, 중국 대륙을 횡단하느라 발이 부르트면서 되뇔 수 있었던 말이라고 생각해. 당나라 연호를 쓰고 당나라 옷을 입는다고 신라가 당나라의 일부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왕이 직접 바늘을 들고 “길이길이 빛나라 우리 당나라”라고 수를 놓아 바친다고 신라가 위험해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당나라의 군대를 움직일 수 있다면, 그래서 신라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승리는 없었을 테니까.

신라가 당대의 슈퍼 파워 당나라에 허리를 굽혔을지언정 당나라의 꼭두각시로 전락하지 않은 것은 김춘추 이후의 역사가 증명한다. 약속 위반죄로 신라 장수를 처형하겠다는 당나라 소정방 앞에서 “이렇게 나오면 먼저 당나라와 맞장을 뜬 다음 백제랑 상대하겠다”라고 외친 김유신이나 백제·고구려 멸망 후 벌어진 신라의 거국적인 당나라 축출 전쟁이 어떻게 가능했겠니. 나당 전쟁 와중에 한때 인질 겸 외교관으로 당나라 장안에 오래 머물렀던 김춘추의 아들 문무왕은 아버지의 담판 결과를 들이밀며 당나라를 공박한다. “황제는 말씀하셨소.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것이 아니니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토지를 모두 신라에게 주고자 한다.’” 마침내 기벌포 해전 후 당나라 세력이 완전히 물러가고 문무왕이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 살게 하였다”라고 선언하던 날 저승의 김춘추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거야. 모질고 기나길었던 전쟁의 승리자로서.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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