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드를 올리고〉 고정순 지음, 만만한책방 펴냄

빨간색 권투 글러브를 낀 채 ‘가드를 올리고’ 있는 우람한 체구의 권투 선수가 링 위에 서 있다. 나는 권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그 좋아하던 ‘주말의 명화’를 아버지가 애청하던 권투 중계에 매번 빼앗기면서, 권투 좋아하는 남자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으리라 굳은 결심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표지에는 왠지 마음을 빼앗겼다. 거의 90%를 차지하는 하늘색 배경. 그저 스케치 같은 간결한 그림에 빨간 글러브를 대비시키려는 걸까? 책을 읽고 나니 이유를 알겠다. 권투 경기를 산 오르기에 비유한 글의 배경 색이다. 가드처럼 수직으로 서 있는 제목. ‘가드를’은 삐딱하고, 글자는 대부분 바스러져 부스러기를 쏟고 있다. 흔들리지만 다시 똑바로 서고, 그렇지만 얻어터지며 피와 땀을 쏟는 선수 모습 그대로다. 그런데 이 몸집은… 권투 선수라기보다는 레슬링 선수 같다. 걸맞지 않은 경기에 끌려나와 가드를 올렸다기보다는 가드 뒤로 숨은 듯 보인다. 비장하지만 어딘가 우스꽝스럽고, 당연히 비극을 예고하는 것 같은 이 선수. 탁월한 디자인에 힘입어 표지 그림이 심장을 꾹 움켜쥔다.

때리고, 맞고, 피하고, 때리고, 맞고, 피하고(어쩌다 둘이 끌어안은 채 맴돌고)…. 권투는 그렇게 단조로워 보이는 운동인데, 책을 펼치니 너무나 역동적인 장면들이 쏟아진다. 세부 묘사를 생략한 채 굵은 목탄 몇 번 휙휙 그은 듯한 자국으로(실제 작가의 손길은 수천 번 지나갔을 것이다) 주먹이 날아가게 만든다. 퍼벅! 글러브가 얼굴을 강타하는 소리가 귓전에서 들린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일까? 유효펀치 한 번 날리지 못한 채 계속 얻어맞는 인물이 포기하지 않고 싸워 결국 승리한다는 영웅담을 그리려는 걸까? 하지만 아니다. 맞고 쓰러지다 일어나서 부어터진 얼굴로 자세를 가다듬은 선수가 ‘다시 가드를 올리고’에서 끝난다. 감탄스럽지만 알 수 없는 그림이다. 여기에 의미를 더해주는 게 감탄스러운 글이다.

일어서는 것은 여전히 힘겹지만…

글은 권투 경기를 중계하지 않고 전혀 다른 소리를 한다. 주먹이 뻗어 나가는데 “처음에는 단박에 오를 것 같았지”라고 한다. 헛손질을 할 때는 “좁은 길을 지나 골짜기를 넘어”다. 다른 길로 갈까? 그만 내려갈까? 올라갈 수 있을까? 더 이상 못 걷겠어. 여기가 어디지? 길을 잃었나 봐. 산 위에는 정말 바람이 불까? 중얼거린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소리는 아니다. 산 오르기와 권투가 순간순간 함께 가지는 속성이 담겨 있다. 멀어지다 가까워지다 하면서 나란히 달리던 철로 같은 글과 그림은 한 지점에서 딱 만난다. “땀이 비처럼 쏟아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라는 장면. 그렇게 글과 그림이 연결되면서 메시지 외연이 확연히 넓어진다. 이건 권투에 관한, 산 오르기에 관한, 그러니까 우리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에게도 세상이 ‘단박에 오를 것 같은’ 때가 있었겠지. 하지만 사실은 터무니없이 불리한 경기에 내몰렸음을 깨닫는 데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계속 얻어맞고, 길을 잃고, 쓰러지고, 조금만 더 가자 기운을 냈다가, 나는 뭘 하는 거지? 좌절하는 삶. 작가는 이 삶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부어터진 얼굴로 잠깐씩 웃다가 다시 입 꼬리가 내려가도, 가드는 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넘어지는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지만 일어서는 것은 여전히 힘겹다’는 작가가 힘을 잃지 않기를.

기자명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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