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동네에 국수공장이 있었다. 빨랫줄 같은 곳에 국수가 매달려 있었다. 햇볕에 말리던 국수는 마치 과자 같았다. 엄마는 국수공장 옆을 지날 때면, 주인 허락도 받지 않은 채 국수를 한 가닥 잘라서는 간식인 양 내게 주었다. 마른 국수는 밀가루의 텁텁함이 약간 남아 있었고 짭짤했으며, 오도독 소리를 내며 씹혔다. 그때 내게 국수란 그저 그런 것이었다.
국수 또는 면 요리에 빠진 건 다 자라서였다. 일본에서 신세계를 만났다. 엄청나게 치대서 만드는 반죽과 적절한 숙성, 그리고 기묘한 탄성은 면이란 이렇다는 걸 보여주는 교범 같았다. 일본은 면 요리의 최강자였다. 반대로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 맛본 면은 실망만 안겨주었다.
일본의 면에 대해 가졌던 경외감은 오키나와에서 깨졌다. 소바라는 이름을 쓰면서 메밀이 아닌 평범한 밀가루 면이라는 점도 특이했지만, 충격은 면을 집었을 때 시작됐다. 면을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자 툭툭 끊어졌다. 면발을 튕겼을 때 백만 서른 한 번의 탄력까지 기대한 건 아니지만, 처음 본 오키나와 소바의 면발은 한국인이라고 일부러 설익은 면을 내온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낯설었다. 면의 나라 일본에서 이런 국수가 특산으로 불리고 널리 소비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덕력’을 발휘해 이 국수의 정체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면발의 정체는 국수 제조법에 있었다. 오키나와 소바는 밀가루를 반죽해 숙성시키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면을 뽑았다. 곧바로 물에 20초가량 삶은 뒤 기름을 발라 보관했다. 손님이 음식을 주문하면 그릇에 면을 넣고 육수를 부어서 내면 끝이었다. 이렇게 국수를 만드는 이유는 고온다습한 오키나와 기후에서 반죽을 방치했을 경우 숙성되는 게 아니라 부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 사람들이 오키나와 소바를 언제부터 먹었는지 그 기원은 정확하지 않다. 오키나와 사람이라면 매일 한 끼는 소바를 먹는다고 할 정도로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는데, 기록에는 1902년 개업한 ‘지나 소바’가 그 원조다. 전통 요리가 그렇듯 요리의 기원을 두고 이런저런 상업적 스토리텔링만 난무하는 경우가 많다. 흥미로운 건 오키나와 소바를 둘러싼 이야기가 상당히 정교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오키나와 소바의 한 종류인 ‘미야코 소바(미야코 섬 지역에서 먹는 소바)’에는 오키나와의 비극적 역사까지 인용된다. 미야코 섬에 가면 고명을 면 아래에 까는 소바집이 있다. 고명을 면 위에 올리면 잘산다고 생각해서 세금을 많이 걷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머리 좋은 누군가가 만든 이야기가 정설로
하지만 이 스토리텔링에는 허점이 있다. 우선 과거에는 밀가루가 귀했다는 사실을 빠뜨렸다. 오키나와 본섬 사람들도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밀가루 요리를 미야코 섬 주민이 즐겨 먹었을 리 없다. 게다가 세금 때문에 고명을 위에 올리지 못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오키나와에서 이웃한 중국만 가도 바로 깨진다. 국수를 즐겨 먹는 중국 광둥성 지역의 차림새를 보면 미야코 소바와 똑같이 면을 위로 올리고 그 밑에 고명을 깐다. 요즘도 홍콩에서 제법 유서 깊다는 완탕면 집에서는 완탕을 그릇 바닥에 깔고, 국수를 그 위에 올린다. 외국인 여행자로서는 맛있는 새우 완탕이 면 위로 올라가지 않는 게 의아할 뿐이다.
결국 머리 좋은 누군가가 만든 이야기가 정설처럼 여기저기 인용되고 있는 셈이다. 어찌 보면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이고, ‘창작 대상’에 따라서는 한국도 좀 배울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이순신 밥상’처럼 정체불명의 이야기만 난무하는 현실이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
카지노 칩으로 우공이산
카지노 칩으로 우공이산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우공이산’이라는 고사성어를 잘 활용했던 이는 마오쩌둥이다. 그는 변변한 무기도, 거점도 없이 대장정과 농민 지지를 기반으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산을 옮겼다. ...
-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 왜?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 왜?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진짜로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마을이 있던 자리에는 ‘유적 발굴 예정’이라는 간판과 함께 사원 터의 기둥이라는 구조물이 하나씩 꽂혀 있다. 지금 이야기하는 곳은 남인도 ...
-
우리가 알던 그 홍콩이 아니다
우리가 알던 그 홍콩이 아니다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3월1일 한국영화 〈1987〉이 ‘1987 逆權公民(권력에 맞선 시민)’이라는 제목으로 홍콩에서 개봉했다. 첫 주의 스코어는 5위였다. 홍콩 사람들은 〈1987〉을 지난해 8월 홍...
-
“주연 배우 코 잘라라” 인도 극우파 난동
“주연 배우 코 잘라라” 인도 극우파 난동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영화 한 편을 보는 게 이리 두렵기는 처음이다. 영화를 제작할 때부터 세트장 파괴가 이루어졌고, 인도 4개 주 정부는 영화의 상영금지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대법원이 영화 상영을 ...
-
오키나와 음식은 왜 맛이 없을까
오키나와 음식은 왜 맛이 없을까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일본 하면 으레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운 먹거리만 지역 특산품으로 팔리는 줄 알았다. 오키나와에서는 고작 ‘흑당(黑糖)’이라 불리는 검은색 설탕이 특산품이다. 인도에서는 ‘재거리(Ja...
-
취업 때문에 두른 터번
취업 때문에 두른 터번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영국은 전 세계에 퍼져 있던 수많은 식민지에 커다란 상처와 인상적인 기념품을 동시에 남겼다. 그중 하나가 과거 영국령의 고급 호텔에서 발견할 수 있는, 터번을 머리에 두른 인도인 ...
-
먹을 만한 찌개 없어도 홍콩은 한식 붐
먹을 만한 찌개 없어도 홍콩은 한식 붐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요즘 홍콩에는 한식당 붐이 일고 있다. 매년 새로운 집들이 생겨난다. 과거 홍콩 교민들이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먹던 찌개나 탕 또는 한국 음식의 대표 메뉴인 삼겹살, ...
-
싱가포르가 담긴 국수 한 그릇
싱가포르가 담긴 국수 한 그릇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한식당이 없는 외국 여행에서 중국요리(중식)는 가장 중요한 대체재다. 일본 요리도 입에 맞기는 하지만 어느 나라를 가든 가격이 비싸다는 게 문제다. 그렇다 보니 중식은 인도 음식이...
-
오키나와인들의 선택은 ‘공존과 평화’
오키나와인들의 선택은 ‘공존과 평화’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지난 9월 일본에서는 큰 선거가 두 건 치러졌다. 9월20일에 자민당 총재 선거를, 9월30일에는 오키나와 현 지사 선거를 치렀다. 오키나와 지사 선거는 8월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