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수업 시간, 연예인 지망생 아들을 둔 엄마가 글을 써왔다. 아이가 고등학교 시절 연극영화과를 지망한다고 했을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우리 집안에 그런 피 없다”라고 말했고, 엄마인 자신만 홀로 지지했다고 한다. 진로, 연애, 취업 등 인생의 모든 선택에서 ‘엄마는 무조건 네 편’이라는 응원에 힘입어, 아이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고 엄마는 아들의 공연에 초대받는 유일한 혈육이자 비밀 없는 친구가 되었다는 훈훈한 일화였다.
이 글을 본 20대 취업준비생 학인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현실에 없는 엄마 같다, 이렇게 자식을 믿어주고 밀어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엄마 학인은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너무 사소한 이유라서 굳이 글에 쓰지 않았다고 했다. 사연인즉, 대학 시절 친구들 넷이 월미도에 해 지는 걸 보러 갔는데 귀가 통금 시간에 걸려 자신만 일몰을 놓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으니 그때 눈물을 삼키며 결심했단다.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자유롭게 살게 하리라. 삶의 한 장면도 놓치게 하지 않으리라.
엄마 학인의 수줍은 고백과 달리, 일몰을 볼 권리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한 사람의 세계관을 바꿔놓을 만큼 강력하지 않은가. 직장인은 해 지는 거 보자고 벼르다가 휴가를 낸다. 안면도로 달려가고 지중해로 날아간다. 푸른 하늘 한갓지게 감상하는 것도 서툴러, 여행을 가서도 전지훈련 온 선수처럼 빼곡한 일정을 짜서 새벽부터 경치 좋은 곳을 필사적으로 찾아다닌다. 하늘, 구름, 바다, 나무, 꽃, 석양은 일 년 내내 소처럼 노동한 보상으로 접할 수 있으니 어찌 사소하다 할까.
자연을 벗할 권리가 기본권으로 보장되면 좋겠다. 소파 방정환 선생의 글 ‘어린 동무들에게’에도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182쪽)”라는 구절이 있다. 물론 지금처럼 도시화된 환경에선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서울서 자란 나는 일출과 일몰을 주로 텔레비전의 애국가 영상으로 보며 컸다. 두 아이도 온갖 ‘체험학습’으로 돈 내고 자연에 노출시켰다. 갯벌 체험, 밤 줍기 체험, 고구마 캐기 체험 같은 것들. 그런데 푹 빠져들 틈도 없이 우르르 가서 시늉만 하다가 김밥 먹고 시간 맞춰 돌아오는 게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행위인가 이제야 알겠다.
“무엇엔가 멈추어본 아이만이 자기 삶을 만날 수 있다. 자기 삶을 만난 아이만이 자세히 볼 수 있고, 자세히 볼 때 놀라운 삶의 경이를 만날 수 있다. (중략) 자기를 만난다는 것은 자기 흥을 만나는 것이고 그때 그 무엇에 정신을 팔았다는 말일 것이다(190쪽).”
“좀 노는 것같이 놀아보자”
나는 논두렁 밭두렁 뛰어다니며 놀지는 못했지만 시멘트 바닥에서 고무줄놀이하며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애들 얼굴 안 보일 때까지 ‘정신 팔며’ 놀았다. 아마 내가 그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싶다. 시간을 잃어버리고 놀 기회를 너무 일찍 박탈당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자기 흥을 발견할 기회도 없이 무엇에 쫓기듯 정해진 일과표 속으로 아이를 밀어넣는 부모가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엄마 학인의 글을 보면서 뜨끔하기도 했다.
올해 고등학생이 된 딸아이는 5월에 수학여행을 가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수련회였다며 가지 않겠다고 했다. 놀 시간도 안 주고 극기 훈련이랑 교육만 시키는 수련회는 딱 질색이라며 다른 애들도 그러기로 했단다. 나는 무조건 지지한다고 했다. “아이들의 세계는 먹고 노는 세계(235쪽)”다. 2008년 일제고사 거부 투쟁에 나선 청소년들의 구호는 “잠 좀 자자, 밥 좀 먹자”였다. 그로부터 10년 뒤 사적 저항에 나선 딸아이의 구호는 “좀 노는 것같이 놀아보자”다. 그래, 노는 것이면 충분하다. “세상 어떤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관찰하라(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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