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베트남 기자협회 초청을 받아 한국기자협회 대표단에 끼어 베트남을 방문한 일이 있다. 당시 베트남 기자협회장과 1시간 가까이 회담하며 양국 기자들 간의 교류 방안을 논의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그곳 기자협회장은 베트남 집단지도체제의 최고 의사결정 기관인 공산당 정치국원 18인 중 한 명이었다. 정치국에는 당 서기장, 국가주석, 총리, 국회의장이 포함돼 있다. 민간인인 우리가 한국의 대통령이 만나도 어색하지 않을 베트남 최고위 인사와 공적인 회합을 가진 셈이다. 당시 한국 기자협회장은 YTN 해직 기자였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언론은 철저하게 당의 선전과 홍보를 위한 도구이다. 베트남 기자협회에 속한 모든 회원은 당연히 충성도 높은 공무원이자 당원이다. 한국기자협회는 애당초 국가권력의 언론 탄압에 맞서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 이명박 정부가 떨어뜨린 낙하산 사장에 의해 해직된 YTN 기자가 회장이 된 것도 바로 이런 저항 정신이 만들어낸 결과다. 서로 다른 체제와 문화가 만나면 이렇게 이질적인 집단끼리 서로의 관심사를 논의하는 난감한 일도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981년 덩샤오핑이 집권한 이후 중국이 개혁 개방을 실천한 지 30년이 넘었지만 서구식 체제와 사고에 익숙한 이들에게 중국은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다른 나라에서 경제와 외무장관은 대개 대통령이나 총리 다음으로 중요한 직위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대외 경제, 외교 담당자는 서열 25위 안에도 못 낀다. 다른 나라의 경제나 외교 수장들은 같은 급이라고 생각했던 인사들과 만나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야 헛수고를 했다는 걸 깨닫기 일쑤이다. 공식적으로 법원이나 군도 정부가 아니라 당이 지배한다. 중국 법원이나 군 관계자들을 만나도 덕담 말고는 주고받을 게 없을 때가 많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이득을 보거나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으려면 이 같은 중국 체제 특유의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최고 권력기관인 공산당의 핵심은 총서기, 정치국 상무위원회, 중앙군사위원회가 포함된 중앙위원회이다. 당원 8600만명 중에서 선거로 뽑힌 200명 남짓의 중앙위원과 150여 명의 중앙후보위원으로 구성된다. 1997년 제15차 당 대회에서 푸젠성 부서기였던 시진핑은 중앙위원보다 급이 낮은 중앙후보위원으로 만족해야 했다. 중앙후보위원 가운데서도 서열이 151위, 꼴찌였다. 시진핑을 잘 봤던 몇몇 고위 간부가 억지로 정원을 늘려 선심을 쓴 결과였다. 그랬던 그가 불과 20년 만에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절대 권력자가 된 비결은 무엇일까. 시진핑이 권력을 움켜쥐게 된 과정을 추적하다 보면 중국을 한층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레닌 체제를 본뜬 모든 국가가 그렇듯 중국 역시 후계 문제가 항상 체제 자체를 흔들었다. 1921년 당 창건 이후 지도자 11명 중 정해진 일정에 따라 자기 발로 권좌에서 내려온 이는 시진핑의 전임자인 후진타오 단 한 명이었다. 7명은 처형되거나 숙청당했다. 살아남은 원로는 끊임없이 권력을 되찾으려고 일을 꾸몄다. 마오쩌둥은 1966년 정치적 부활을 위해 문화혁명을 일으켰다. 홍위병으로 불린 청소년 조직을 부추겨 지식인을 억누르고 실권을 되찾았다. 문화혁명 기간 중국 사회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덩샤오핑 역시 은퇴 이후에도 당 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놓지 않고 막후 최고 실력자로 군림했다. 거의 반세기 가깝게 중국은 원로정치, 상왕정치에 휘둘렸다.

ⓒ한성원 그림

덩샤오핑은 새로운 규칙·규범·전례를 만들어 미래의 중국을 좀 더 질서 있고 예측 가능한 체제로 만들고자 했다. 국제 자유무역 체제의 일원이 되려면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1968년 이후 사라졌던 국가주석 직을 부활하고 주석과 부주석의 임기 제한, 고위직의 정년퇴임 규정을 신설했다. 당과 정부의 업무 구분을 분명히 해 대외 관계에서 혼란을 줄이려고도 노력했다. 1989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서 물러나며 본인의 마지막 임무는 은퇴 시스템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하지만 나는 상왕 노릇을 해도 너희들은 안 된다는 식의 덩샤오핑 개혁은 처음부터 한계가 분명했다. 덩샤오핑의 후계자 장쩌민은 지도력이나 경제 운용 능력은 떨어졌지만 권력에 대한 집착이나 파벌을 만드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덩샤오핑이 차기 후계자로 지명한 후진타오를 무력화하기 위해 상무위원회와 중앙군사위원회에 자기 사람을 밀어넣었다. 후진타오가 후계자로 키우고 있던 차세대 지도자 리커창(현 국무원 총리이자 당 정치국 상무위원)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을 전전하며 기회만 엿보던 무명의 시진핑을 중앙으로 끌어올렸다. 그 탓에 후진타오는 집권 10년 동안을 장쩌민과의 권력 다툼에 오롯이 바쳐야만 했다.

후진타오에게 기회가 온 것은 2012년 2월이었다. 당시 충칭시 서기장이었던 보시라이와 대립하던 부시장 왕리쥔이 미국 총영사관에 무단으로 침입해 망명을 요청한 것이었다. 미국이 반발할 게 뻔한데도 대규모 무장 경찰을 파견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왕리쥔의 신병을 인도해온 후진타오는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왕리쥔 입에서 장쩌민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보시라이의 비리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후진타오는 보시라이 사건을 계기로 장쩌민의 후광으로 상무위원회 과반을 점하고 있던 자칭린이나 저우융캉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련한 장쩌민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후진타오의 측근 중 측근이었던 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 링지화가 보시라이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것을 들춰낸 것이다. 링지화는 후진타오가 그만둘 것에 대비해 장쩌민 쪽에도 보험을 들었던 것이다.

궁지에 몰린 후진타오의 선택은 ‘너 죽고 나 죽자’였다. 2012년 11월 열린 중국공산당 당 대회에서 국가주석뿐만 아니라 군사위원회 주석, 당 총서기까지 모든 자리를 시진핑에게 승계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시진핑은 그 자리에서 한번 사양하는 법도 없이 “후진타오 동지의 결단에 최고의 경의를 표하고 싶다”라면서 덥석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 뒤 시진핑은 “호랑이도 쉬파리도 때려잡겠다”라며 부패 척결을 기치로 내걸고 당과 군에 남아 있던 장쩌민의 심복들을 쓸어내버렸다.

그 과정에서 당의 원로들과 3000명에 달하는 혁명 1세대의 직계인 훙얼다이(紅二代)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묵계를 맺었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실제로 그의 부패 척결 칼날은 신통하게도 훙얼다이만 피해갔다. 시진핑 주석 역시 아버지가 국가 부주석을 지낸 금수저이다. 중국은 엄밀히 말하면 집단 세습체제이다. 어쨌건 중국에서 오랜 상왕정치가 끝났으며 시진핑 1인 독주 시대가 열렸다.

어떻게 보면 중국 정치에 오랫동안 드리웠던 불확실성이 한 꺼풀 벗겨진 셈이다. 장쩌민과 사생결단을 해야 하는 상황까지 몰리지 않았다면 후진타오 역시 쉽게 물러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중국을 상대하는 국가들은 막후의 실력자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

중국 정치를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으로 비치게 하는 주범 ‘소조’

하지만 덩샤오핑이 꿈꿨던 대로 중국이 좀 더 예측 가능한 사회가 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 주석이 스스로에게 권력을 집중하느라 공적 체계 자체를 계속 흔들어대기 때문이다. 외부인에게 중국의 정치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비치게 하는 주범 중의 하나는 공산당 내의 작은 모임인 이른바 링다오샤오주(領導小組:영도소조, 이하 소조)이다. 도대체 몇 개나 있는지, 누가 속했는지, 얼마나 자주 만나는지 모든 게 수수께끼다. 지금도 정확하게 알려져 있진 않지만 중국 연구자들에게 이 소조가 종종 공권력을 무색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는 점은 익히 알려져 있었다. 독일의 싱크탱크 MERICS(Mercator Institute for China Studies)에 따르면 시진핑 주석이 이들을 부리는 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는 중이다.

소조는 1958년 처음 생긴 이래 정책 수립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다. 문화혁명을 거쳐 힘을 키운 소조 중 마오쩌둥의 아내 장청이 만든 소조는 한때 중국 전역을 쥐락펴락하기도 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 연구에 따르면 소조는 1981년 44개였다가 1998년 19개, 2009년 29개로 정치 상황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이들은 타이완, 홍콩, 북한, 아프리카, 인터넷 보안, 법률 시스템 등 거의 모든 정책을 다룬다.

시진핑 주석 집권 5년 동안 이 소조는 급증했다. MERICS에 따르면 2017년 5월 45개로 불어났으며 시진핑 주석이 직접 만든 것만 해도 16개가 넘는다. 소조는 지금 슈퍼 소조로 진화하는 중이다. 슈퍼 소조가 다른 소조와 다른 점은 전국 조직을 갖췄다는 것이다. 모든 지역에 지부가 있으며 지부는 또 새끼 지부를 거느리고 있다. 이 그룹은 공적 기관과 협력 이상의 일을 한다. 상임 비서가 있으며 필요하면 공무원들을 차출한다. 2020년까지 모든 단계의 경제개발 계획을 짠 것으로 알려졌다. 시진핑 주석의 연설문 초안을 작성하는 곳도 여기다. 비선 실세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을 지경이다. 후진타오 시대까지만 해도 각자 할 일을 갖고 있었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나머지 6명은 사실 할 일을 빼앗긴 상태이다.

많은 중국 연구자들이 경제와 안보를 포함한 모든 정책이 시진핑 주석의 최측근인 리잔수와 류헤 등의 손을 거쳐 소조에 배분된다고 믿는다. 소조는 시 주석의 동지들로 붐빈다. 모든 소조의 위원장은 물론 시진핑 주석이다. 공적으로 경제를 책임진 리커창 총리도 시진핑 주석이 위원장인 소조의 제2인자일 뿐이다. 시진핑 주석 이외의 실력자는 자기가 속한 소조에서 보스의 존재를 항상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소조는 오직 시진핑 주석에게만 충성을 바치기 때문에 점점 개인 우상, 컬트의 성격을 띠어간다. 모든 힘을 거머쥔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중국은 일대 혼란에 빠질 것이다. ‘경쟁자 없는 시진핑’이야말로 중국의 가장 큰 리스크가 아닐까.

참고한 활자:〈13억분의 1의 남자〉(레드스톤), 〈이코노미스트〉,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워싱턴포스트〉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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