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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네거리에 전봉준 동상을 세우다

2018년 05월 06일(일) 제555호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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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에 ‘녹두꽃’이 피었다. 123년 전인 1895년 일본군에 붙잡혀 순국한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 장군 동상이 서울 종로1가 영풍문고 앞에 들어섰다. 동학은 구한말 탐관오리들의 적폐를 뒤엎고 백성이 사람대접 받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일어난 사회변혁 운동이다. 그 최고 지도자가 ‘녹두장군’ 전봉준이었다. 그는 1894년 3월 농민들을 이끌고 봉기한 뒤 전국 곳곳에 농민 자치기구인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해 개혁 운동을 폈다. 이후 일본의 침략에 맞서 그해 9월 2차 봉기에 나섰다가 전북 순창에서 관군과 연합한 일본군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고 전옥서(典獄署)에 수감된 뒤 처형당했다. 이번에 동상이 세워진 자리가 바로 전옥서 터다. 지난 40여 년 동안 ‘동학과 전봉준’을 연구해온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이이화 이사장(81)의 노력으로 동상이 세워졌다.

ⓒ시사IN 신선영

<한국사 이야기> 시리즈로 잘 알려진 재야 사학자 이이화 이사장은 1970년대부터 동학을 연구해왔다. 그는 “일제와 군사정권이 지은 동학의 이름은 ‘동학난’이었다. 명예 회복을 위해 가방 하나 들고 전국 각지에 흩어진 동학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이런 연구를 토대로 역사학자들과 함께 연구와 강연, 저술 활동 등을 통해 동학의 명예 회복을 호소했다. 이런 활약은 2004년 정부가 그동안 ‘난’에 갇혀 있던 동학의 공식 명칭을 ‘동학농민혁명’으로 바로잡게 했고, 기념재단을 발족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이이화 이사장의 목표는 동상 건립이었다. 이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박근혜 정부 때 박정희 지지자들이 전봉준 장군보다 박정희 동상 건립이 우선이라고 맞불을 놓았다. 여의치 않은 부지 확보와 건립 우선순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팽팽한 대립 구도에 돌파구를 열어준 이가 박원순 서울시장이었다. 박 시장은 박정희와 전봉준 동상 건립 안건을 서울시 공공미술심의위에 회부했다. 유관단체 타당성 검토 및 동의서 등 주요 심사 항목에서 전봉준 동상은 통과했지만, 박정희 동상은 기각 보류 판정을 받았다.

서울시는 동상 건립 부지도 선뜻 내주었다. 마침 처형장인 전옥서 터가 서울시 소유지였기에 가능했다. 건립 비용 2억7000만원은 국민 성금으로 모았다. 김수현 충북대 명예교수가 압송되던 전봉준 장군의 사진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40년 만에 꿈을 이룬 소감을 묻자 이이화 이사장은 “역사적 의미로 보면 감개무량한 일인데 나 혼자만의 힘은 아니었다. 전봉준 장군의 비서였던 정백현 선생과 그의 손자 정남기 전 언론재단 이사장, 전봉준 장군 후손인 전성준씨, 사발통문에 이름을 올린 손여옥 선생과 그의 증손 손주갑씨,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등이 힘을 합친 결과라는 점을 꼭 강조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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