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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피스 아키텍트(peace architect)

2018년 04월 30일(월) 제555호
고제규 편집국장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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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고사 세대다. 외우는 건 자신 있었다. 무조건 외웠다. 주기율표도, 국사 연표도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암기하며 유독 구시렁거렸던 게 있었다. 역대 정부 통일방안. 전두환 정권의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 노태우 정권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도무지 차이를 알 수 없었다. 점수를 받아야 하니 투덜대며 주요 내용을 외웠다. 머리가 굵고 나서야 알았다. 분단 구조가 얼마나 강고하고, 평화가 얼마나 어려우며, 통일은 또 얼마나 힘든지. 군사정권 시절에도 ‘피스 키퍼(peace keeper)’ 노릇을 하며 한반도 평화를 지켜내려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중 한 명이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다. 임 전 장관 등 피스 키퍼들은 흑백의 중간지대를 넓히려고 애썼다. 1991년 맺은 결실이 남북 기본합의서다. 협상의 실무를 맡은 임동원은 한밤중 북측의 최우진과 맥주 담판도 불사했다(임동원, <피스 메이커>). 남북 기본합의서는 노태우 정권 시절 체결되었지만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을 잇는 1990년대 평화의 이정표로 평가받는다. 그 임동원은 김대중 정부 때 ‘피스 메이커(peace maker)’가 되어 6·15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의 김대중 대통령, 2007년 10·4 선언(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을 주도한 노무현 대통령도 ‘피스 메이커’로 활약했다. 분단 이후 최초로 김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만나는 장면에 우리는 눈시울을 붉혔다. 노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넘는 순간 우리는 가슴이 설렜다. 하지만 그 감동과 설렘도 잠시였다. 피스 메이커들이 땅을 다지고, 주춧돌을 놓아도, ‘한반도 문제에서 주인’인 우리가 주도하지 않으면 ‘외풍과 역풍’에 시달려야 했다.

이제 문재인 대통령은 ‘피스 아키텍트(peace architect)’다. 문 대통령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놓은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었다. 판문점 선언은 합의문으로만 그쳐선 안 된다. 남북관계는 더 이상 흑백논리에 가두거나, 통일 낙관론에만 젖어 있을 수 없다. 흑백으로 이념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제3의 길이 열리고 있다. 남한에도 보수적이지만 남북 평화를 바라는 ‘보수적 평화론자’, 진보적이면서 한·미 동맹을 바라는 ‘진보적 동맹론자’가 늘고 있다. 평화나 통일은 외워서 되는 게 아니다. 과정이다. 하나의 봄, 새 시대가 열렸다. ‘결코 뒤돌아 갈 수 없다.’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때 운 좋게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2018년 또 한 번 역사적인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순간이다. 판문점 선언 전문을 이번 표지에 특별히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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