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방송국 간판 기자였다. 앵커 경력도 있다. 환경 분야에서 확실한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4대강 정책 비판 기사를 쓰다가 내근으로 밀려나는 시련도 겪었다. 이 정도 ‘스펙’이면 집권 여당에서 국회의원 자리를 보장하겠다며 모셔가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그는 좀 달랐다. SBS에서 지난 2월 정년퇴직한 박수택 전 기자(60)는 올해 6월 지방선거에서 정의당 소속으로 고양시장에 도전한다. 국회의원이 아니라 기초단체장 선거에, 유력 정당이 아니라 국회 의석 6석인 작은 정당으로 나섰다. 굳이 어려운 선택만 골라 했다. 왜 그랬을까.

“3월28일이었다. 미세먼지 문제에 관심이 많은 고양 지역 젊은 엄마들이 오랫동안 노력해서 교육 당국과 간담회를 겨우 만든 날이었다. 어느 방송국 카메라가 취재를 와 있었는데, 그 자리를 주선한 도의원이 그걸 자기와 상의하지 않았다며 공무원들을 몰고 나가버렸다. 엄마들 14명이 화를 내며 우는데, 야 이럴 수가 있느냐 얼마나 오만한가 싶더라. ‘곧 지방선거가 있으니 제가 시의원에라도 나가서 미세먼지 문제를 다뤄볼까요?’라고 덜컥 말을 뱉었다.”

ⓒ시사IN 이명익

그의 말은 곧바로 지역 정가에 퍼졌다. 같은 날, 고양시가 지역구인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연락해왔다. 그는 실랑이 와중에 찢어진 옷 그대로 심 의원을 만났고, 고양시장 선거에 출마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은퇴 후 환경 관련 시민사회 활동을 하리라는 구상은 그렇게 크게 경로가 바뀌었다.

출마 결단은 돌발적이었지만, 풀뿌리 정치에 대한 생각은 오래 품고 있었다. 동료 기자들에게 기초의회나 기초단체장 선거에 나가보라는 말을 듣고 그럴듯하다 생각도 했다. “사회나 환경문제를 취재하다 보니 풀뿌리에서 시민의 참여가 제대로 작동해야 풀릴 문제가 많았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풀뿌리 정치인들이 공천권자만 쳐다본다. 그런 문제의식이 잠재되어 있다가 이번 결정에 영향을 준 것 같다.”

왜 정의당이었을까. “제일 먼저 연락이 왔다(웃음).” 농담으로 말문을 연 그는 곧 고민의 과정을 들려줬다. “나는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였고, 문재인 대통령도 존경한다. 동시에 노동·환경·소수자 문제에서 정의당의 노선에 동의한다. 풀뿌리 지역 정치에서는 거대 양당의 독점 구조가 깨지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시민의 권리를 항아리라고 생각해보자. 큰 돌, 자갈, 모래로 이 항아리를 채워보자. 우선 큰 돌을 넣고, 그 빈틈에 자갈을 넣고, 다시 빈틈에 모래를 넣는 순서가 맞다. 큰 돌만 갖고는 항아리를 빈틈없이 못 채운다. 거대 정당만 갖고는 시민의 권리를 제대로 못 채운다. 지금은 모래를 채울 때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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