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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 리를 간 고려 태자의 위대한 항복

2018년 05월 11일(금) 제556호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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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9년 고려는 몽골과의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무릎을 꿇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다. 몽골은 고려를 멸망시키는 대신 이들 요구를 받아들였다. 고려는 정치적 독립과 독자적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언젠가 너랑 함께 보고픈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는 이런 대사가 나와. 전쟁이 마무리되고 서로의 이익을 위한 각축이 벌어질 무렵, 전쟁 영웅이라 할 주인공 로렌스에게 아라비아의 왕자가 하는 말이야. “젊은이들은 전쟁 속에서 희망과 자유를 추구하지. 그러나 평화는 늙은이들의 악덕으로 만들어간다오. 불신과 경계라는 늙은이들의 악덕 말이오.” 전쟁은 대개 젊은이들의 피와 살로 구성돼. 그 피비린내와 살의 무게를 못 견딜 때 협상을 하게 되고 외교전이 벌어지며 ‘불신과 경계’ 속에 계산이 끝나면 평화라는 값비싼 대가가 주어지게 마련이지. 대륙의 끝에 붙은 한반도의 나라들도 대부분 그랬어.

1231년 몽골군이 첫 침공을 벌인 이래 근 30년 동안 고려는 치열하게 항전했어. 그 항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귀주성 전투 때 몽골의 한 노병이 탄식한 말로 짐작해볼 수 있을 거야. “내가 군대에 몸을 들여놓은 이래 이처럼 심한 공격을 받고도 항복하지 않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AP Photo
몽골 쿠빌라이 칸의 초상화.
쿠빌라이는 고려를 얻는 것을 ‘하늘의 뜻’으로 여겼다.

고려도 힘이 부쳤어. 강화도로 조정을 옮겼으나 그건 소수 특권층을 위한 선택일 뿐이었고 육지의 백성들은 세금은 세금대로 갖다 바쳤어. 이들은 몽골군과 싸우느라 허리가 휘고 손톱이 다 닳을 지경이 됐지. 가문의 권력을 위해 항전을 주장했던 최씨 정권도 무너졌어. 즉 고려는 더 이상 항전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던 거야. 이제 고려와 몽골 간에는 ‘불신과 경계’ 속에 평화를 가져오려는 치열한 외교전이 벌어지게 돼.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무릎은 꿇되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조율과 결정의 장이었지.

몽골의 요구는 일관됐어. 강화도에서 나와 옛 수도 개경으로 돌아가고 최고 통치자가 몽골의 칸에게 와서 항복하라는 거였지(出陸入朝). 최씨 정권이 무너졌으니 국왕이 가야 했지만 당시 고종은 늙고 병들었어. 태자가 결단을 내려야 했지. 1259년 4월 마흔한 살 태자는 전쟁의 시름에 찌든 아버지 고종에게 인사를 드리고 문무백관이 갹출한 은과 베를 여비 삼아 북행길에 나서게 된단다.

요동 땅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돼 태자는 고려를 향해 몰려오는 몽골군과 맞닥뜨려. 몽골군 사령관 송길대왕이 태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왕이 강화도에서 나왔소?” 아직 왕과 조정은 강화도에 있었거든. 송길대왕은 이렇게 싸늘하게 이야기한다. “아직도 강화도에서 뭉개고 있다면 내가 어떻게 군사를 물릴 수 있겠소?” 그러자 태자는 바로 그의 의표를 찌르고 들어가지.

“왕께서는 태자가 들어와 조회하면 군대를 물린다고 했는데, 만약 군대를 물리지 않고 계속 진격한다면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달아나 숨어버릴 것입니다. 뒤에 잘 타이른다고 한들 누가 다시 듣고 따르겠습니까?” 즉 당신이 고려 태자가 몽골에 입조하는 의미를 망가뜨릴 수 있다는 은근한 협박을 하는 셈이야. 그러자 송길대왕은 이를 수용하고 출동을 멈춰. 닥쳐오던 전쟁을 막아낸 태자는 요동을 넘어 몽골 제국 깊숙이 들어갔어.

당시 몽골의 칸은 몽케(헌종). 그는 남송 원정을 위해 수도를 떠나 있었어. 태자는 그를 만나러 또 수천 리 길을 가야 했는데 강행군 와중에 아버지의 부음을 듣게 돼. 태자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해보렴. 항복하겠다고 드넓은 대륙에 들어왔건만 칸 찾아 3만 리를 하느라 발이 부르틀 지경인데 고국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하고 왕위에 올라야 할 자신은 수천 리 밖 이역에 나와 있었으니. 태자는 3일 동안 상복을 입고 예를 표한 뒤 다시 짐 끈을 동여맨다.

“고려만큼 대우받는 나라가 없다”

그런데 또 황망한 소식이 들려. 남송을 공격하던 몽케 칸이 갑자기 급사하고 만 거야. 항복의 대상이 갑자기 없어진 셈이야. 후계자 자리를 두고 세계를 지배하던 몽골의 황족과 귀족들은 두 쪽으로 갈려 대립하게 돼. 몽케의 동생들,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가 그 대립의 축이었지. 그는 선택을 해야 했어. 어디에 붙어야 할 것인가. 고려의 운명을 결정할 선택이었지. 만약 지는 쪽에 ‘베팅’한다면 고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었으니까.

ⓒ시사IN 최예린

여기서 태자는 쿠빌라이를 택한다. 결과적으로 볼 때 그 선택은 매우 전략적이었어. 군사력·경제력으로 보면 중원을 장악하고 있던 쿠빌라이가 우세했지만 몽골 본토와 중앙아시아의 몽골인들로부터 지지를 받던 아리크부카에 비해 정통성이 부족했어. 뭔가 미약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줄 ‘이벤트’가 절실했지. 이때 30년 동안 항복받지 못했던 나라 고려의 태자가 쿠빌라이에게 머리를 조아린다는 건 꽤 큰 선전 효과가 있는 일이었던 거야. 쿠빌라이의 반응을 보면 태자의 선택이 무슨 의미였는지 알 수 있어. “고려는 예전에 당 태종이 친히 정벌했어도 항복시키지 못한 나라가 아닌가. 그런 나라의 세자가 제 발로 걸어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당 태종이 무너뜨리지 못한 건 그 당시의 고려가 아니라 옛 고구려였지만 쿠빌라이가 강조하고 싶은 건 ‘하늘의 뜻’이었지. 고려 태자로서도 몽골 고원에서 말 달리는 유목민 칸보다는 중국 역사를 주워섬기는 쿠빌라이가 좀 더 친숙했을 거야. 쿠빌라이로서도 고려 고종이 죽었다면 자기 눈앞의 태자는 곧 고려 왕이었고 그의 항복은 곧 고려의 항복이었으니 “한 나라를 그냥 얻는 것”과 진배없었지. 이런 분위기에서 고려 태자는 항복하는 처지치고는 꽤 과감한 요구 조건을 내건다. “첫째, 의관(즉 풍습)은 본국지속에 따르고 상하가 모두 바꾸지 않는다. 둘째, 조정에서 보내는 것을 제외하고 다른 사신은 일절 금해줄 것. 셋째, 강화도를 나와 개경에 돌아오되 그 일정은 역량에 맞춰 진행한다. 넷째, 압록강 유역의 몽골군을 철군한다…(윤은숙, <여·몽 관계의 성격과 동아시아의 국제관계>).”

이런 파격적이기까지 한 조건을 내걸 수 있었던 건 “끈질긴 저항으로 몽골이 고려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정립시킴으로써 향후 전개될 양국 관계에서 고려가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던 까닭이야. 쿠빌라이는 이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고려는 정치적 독립과 독자적 문화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단다. 쿠빌라이가 툭하면 “지금 세상천지에서 고려만큼 대우받는 나라가 없다”라고 생색을 낼 정도로 (승리한 제국으로서는) 관대한 조치였지. 전란에 휩싸인 대륙 사방팔방을 누비며 발품을 팔았던 고려 태자의 외교적 승리이기도 했다. 후일 몽골의 내정간섭이 강화되고 고려를 대원제국(몽골)의 한 성으로 편입하자는 의견이 분분할 때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걸었던 것이 바로 세조구제(世祖舊制)였어. 즉 이렇게 말이야. “아니 그럼 세조(쿠빌라이)의 뜻을 거역하시겠다는 겁니까?” 이 항변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 채 끙 하고 돌아앉아버리는 몽골 관리들을 저승에서나마 지켜보며, 쿠빌라이와 대면했던 고려 태자, 역사에 원종(元宗)으로 남은 고려 왕은 빙긋 웃었을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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