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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머이’ 이후 도대체 뭐임?

2018년 05월 24일(목) 제557호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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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도보다리 대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베트남식 개혁’을 추진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그가 모방하고 싶어 하는 베트남식 개혁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이며 저서 <베트남 역사(Vietnam, a History)>로 퓰리처상을 받은 스탠리 카노는 1995년 베트남을 방문해 전쟁 영웅 보응우옌잡 장군을 만났다. 보응우옌잡 장군은 프랑스를 베트남에서 축출한 디엔비엔푸 전투(1954년)를 이끈 신화적 지휘관이다. 베트남이 통일된 뒤에는 부총리 겸 국방장관을 지냈다. 카노 기자는 “마르크스주의는 어떻게 된 거요?”라고 질문했다. 베트남공산당이 ‘도이머이(혁신)’를 선언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때였지만 마치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투철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알려진 보응우옌잡 장군은 이렇게 답변했다. “마르크스가 위대한 분석가이긴 하지. 그러나 국가를 어떻게 운영하라는 구체적 지침을 내리지는 않았거든…. 인민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만 한다면 그것이 사회주의 아니겠어?”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도보다리 벤치 대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베트남식 개혁’을 추진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카노 기자를 놀라게 하고, 보응우옌잡 장군을 변호사로 만들었으며, 김정은 위원장이 모방하고 싶은 베트남식 개혁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EPA
2015년 4월30일 ‘종전기념일’에 호찌민 시에서 열린 불꽃놀이 장면.

1975년, 모든 외세를 나라 밖으로 축출하는 데 성공한 베트남공산당은 민족주의적 열정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로 충만해 있었다. 곧바로 전 국토에 대한 사회주의적 개조에 들어갔다. 새롭게 ‘해방’시킨 베트남 남부의 산업시설을 국유화하고 농가를 집단농장으로 묶는 작업이었다. 희망에 찬 나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5년도 지나지 않아 사회주의적 중앙계획경제가 인민들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데 그리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기간산업인 농업 부문에서는 통일 이후 곡물 수확량이 오히려 줄었다. 전통적으로 쌀 수출국이던 베트남의 농촌이 허기로 신음하게 되었다. 집단농장에서 국가가 정한 곡물을 정해진 양만큼 생산해 정해진 가격으로 국가에 넘기고 나면 남는 곡물은 얼마 되지 않았다. 집단농장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도 엄청났다. 기술과 자본재(기계)가 희귀한 데다 기계 수입에 필요한 외환도 구하기 힘든 상황에서 공업 부문의 급격한 발전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더욱이 사회주의라는 체제 자체가 베트남의 경제발전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당시 베트남처럼 물자가 귀하면 가격이 오르기 마련이다. 시장경제에서라면 생산자들은 앞다퉈 공급이 부족해 값이 오른 물자의 생산에 뛰어든다. 이에 따라 사회 전체 차원에서 해당 물자의 공급이 늘어나 가격 역시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곡물 등 필수품의 가격을 인위적으로 낮은 수준에 고정시킨다. 결국 같은 물자인데 가격은 두 개인 상황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농민(국영기업)이 벼 한 섬(비누 한 상자)을 100동(베트남 통화 단위)으로 국영 상점에 넘긴다고 가정하자(공식 국정가격). 그런데 벼(비누)를 빼돌려서 국가 이외의 3자(암시장)에게 팔면 500동을 받을 수 있다(시장가격). 해당 물자가 희소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국영 상점의 진열장은 비게 된다. 용케 국영 상점으로 해당 물자가 들어와도, 인민들은 싼 국정가격으로 사서 암시장에 비싸게 파는 방법으로 큰 수익을 챙길 수 있다. 가격의 이중화 현상이다.

베트남에서는 통일 직후부터 암시장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곡물 등 필수품의 생산이 원만하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국정가격은 그대로이지만 암시장의 시장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공식적으로 집단농장과 국영기업에 소속된 인민들이 암시장에서 상당 부분의 소득을 얻었다. 중앙계획경제가 겉만 번지르르한 허수아비였다는 이야기다. 공산당은 전국에서 집단농장화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 중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집단농장으로 이름만 내걸고 여전히 가족농 중심으로 생산하는 마을도 드물지 않았다. 1970년대 하반기의 베트남은 하루 400만 달러에 달하는 소련의 원조 자금으로 겨우 연명해나가는 나라였다. 보응우옌잡 장군이 털어놓았듯이 통일 직후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의 인민들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1979년부터 자유주의적 경제개혁 시도

베트남의 개혁이라면 흔히 1986년 도이머이만 연상한다. 사실은 통일 4년째인 1979년부터 이미 시장 원리를 경제 시스템에 도입하는 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이 시도되었다. 당시 60~70대였던 ‘혁명 1세대’는 ‘사회주의로의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비공식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시장경제 부문은 부분적 합법화를 계기로 사회주의 중앙계획경제 시스템을 절벽으로 몰아붙이게 된다.

ⓒ연합뉴스
외국인투자법은 베트남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위는 삼성전자 베트남 생산법인의 휴대전화 공장.

베트남 정부는 1979년 농촌의 집단농장화를 중단했다. 이윽고 ‘그룹 계약 시스템’을 도입한다. 여러 명으로 구성된 작업 그룹과 집단농장이 ‘특정 곡물을 특정 양만큼 수확하겠다’라는 계약을 맺는다. 작업 팀이 그 이상을 수확하면 시장에 내다팔아도 된다. 농민들에게 수익이라는 생산 동기를 부여한 것이다. 이와 함께 곡물의 공식 국정가격을 시장가격 수준으로 5~10배 올렸다. 시장 말고 국가에 판매하라는 이야기다. 사회주의 국가 스스로 시장과 곡물 쟁탈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공산품을 생산하는 국영기업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시스템’ 유지를 전제로 경영 자율성을 강화해주었다. 국영기업들은 국가로부터 낮은 국정가격에 제공받는 원자재를 투입해서 생산한 물자는 국정가격으로 국영 상점에 공급해야 했다(사회주의 생산 시스템). 그러나 국영기업은 자율적으로 시장에서 매입한 원자재(당연히 가격이 비싸다)로 물자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시장에 국정가격보다 비싸게 내놓을 수 있다. 국가가 명령한 품목 이외의 종목을 만들어도 괜찮았다. 자영업이나 민간 기업에 대한 금지도 완화됐다. 이런 자유주의적 개혁 조치에 따라 생산이 활성화되면서 물가 역시 안정되기 시작한다.

베트남공산당의 보수파들은 상황이 개선되자 오히려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다. 1983년, 공산당 내 최고 권력기구인 정치국에서 자유주의 개혁의 선봉인 응우옌반린을 축출하면서 강력한 반개혁 조치를 감행하기 시작한다. 농업 집산화를 재개하고, 민간 소기업과 자영업에 대해 폐업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 종전의 10동을 새로 발행된 1동으로 교체하는 화폐개혁을 실시하면서 교환 가능한 1인당 화폐량을 제한하기도 했다. 민간 부문에 축적된 부(富)를 쓸어버릴 목적이었다.

그러나 보수파들은 ‘권력이 이미 시장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싶었다면, 1979년부터 시행된 개혁 자체를 차단해야 했다. 일단 시장경제와 중앙계획경제가 경쟁하는 국면을 허용해버리면 언제나 ‘전자’가 승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회주의 국가로서는 농민들로부터 높은 시장가격에 사들인 곡물을 도시 노동자들에겐 저렴한 국정가격으로 제공(배급)할 수밖에 없다. 그 차액은 고스란히 국가 재정으로 메워야 한다. 장기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방안이 아니다. 국영기업 경영자들은 국정가격에 입수한 원자재로 만든 물자를 국영 상점이 아니라 시장으로 빼돌려 비싸게 팔고 싶어 한다. 사실은 베트남 국가가 국영기업에 원자재를 제대로 배급하지도 못하고 있었으므로 시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매입해야 했다. 비싸게 산 원자재로 만든 완제품을 국정가격으로 싸게 납품하는 구조에서는 항구적 적자에 시달리게 된다. 체제가 삐거덕거렸다. 궁지에 빠진 보수파들은 나름으로 머리를 썼다. 1985년 국영기업의 제품에 대한 국정가격과 임금을 대폭 올렸다. 그래야 국영기업들이 물자를 시장으로 빼돌리지 않을 것이었다. 불어난 수익으로 시장의 비싼 원자재를 매입할 수도 있다.

그 결과는 매우 파국적이었다. 아무리 교묘한 대책을 시행해도 물자 자체의 생산수준이 낮은 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물가인상률이 기록적 수준으로 올라갔다. 임금 인상으로 시중에 나온 엄청난 규모의 통화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1986년 한 해 동안 베트남의 물가인상률은 무려 700%에 달했다.

1986년 12월의 베트남공산당 당 대회에서 대대적 물갈이가 벌어졌다. 보수파들이 자아비판을 통해 퇴출되고 ‘베트남의 고르바초프’라 불리는 응우옌반린이 공산당 총비서로 복귀해 ‘도이머이’를 선언했다. 응우옌반린 체제는 보수파들이 농촌에서 추진하던 집단농장화 정책을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사실상의 가족농을 부활시켰다. 농토의 소유자였던 집단농장은 가족 단위로 땅을 재배분했다. 15~20년의 ‘토지사용권’을 부여했다. 이름은 사용권이었지만 사실상의 소유권이었다. 제3자에게 해당 토지를 빌려주거나 사고팔고 돈을 빌리기 위한 담보로 제공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용권을 자녀에게 상속할 수도 있었다. 집단농장은 작업팀이 아니라 개별 가구와 직접 계약을 맺었다. 가족들은 계약한 분량 이상의 농작물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었다. 곡물에 대한 가격 통제도 폐지되었다. 집단농장은 관개시설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농민들의 신용 대출에 보증을 서주는 사실상의 농업협동조합으로 전환되었다. 이렇게 농촌에서 중앙계획경제의 제도적 인프라가 사라졌다. 다만 토지사용권의 거래가 허용되면서 부농들이 땅을 매집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과 정부의 부패 관료들이 부농들과 짜고 토지를 불공평하게 배분하는 바람에 소요가 발생하기도 했다. 1988~1990년에 제기된 민원이 무려 20만 건에 달했다.

사회주의 중앙계획 시스템은 기업 부문에서도 크게 완화되었다. 상당수의 공산품과 원자재에 대한 가격통제가 사라졌다. 국영기업들은 이전에 비해 자율적으로 생산 품목과 생산량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1990년에는 회사법 제정을 통해 민간 기업을 합법화했다. ‘관민(官民) 합작 기업’도 인정되었는데, 민간 투자자는 기업 이윤 가운데 자신의 투자 지분에 비례해서 금융 수익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도이머이 이후 눈부시게 상승한 경제성장률

ⓒEPA
베트남은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 쌀 수출국으로 성장했다.
위는 2016년 7월 하노이 교외에서 논일하는 모습.

저개발 국가의 경제발전에는 국내 시장의 활성화만큼 중요한 요소가 있다. 바로 ‘외국인 직접투자(FDI)’다. 외국인들이 베트남에 투자하려면 일단 외환을 베트남 통화인 ‘동’으로 바꿔야 한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 정부는 외환을 획득해서 아직 국내 생산이 불가능한 해외 자본재를 사들여올 수 있다. FDI 자체가 국내 고용을 늘리고 기술을 이전해주며 산업 전후방 효과를 통해 경제 전반을 활성화하기도 한다. 베트남은 이미 1977년에 외국인투자법을 제정한 바 있지만 성과는 없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경제 노선을 견지하는 데다 소유권까지 인정하지 않는 나라에 귀한 돈을 투자하려는 용기 있는 외국인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베트남에 기업을 설립한다 해도 외국인은 지분 49%에 만족해야 했다. 베트남 국가가 경영권을 가진다는 이야기다. 이런 측면에서 베트남이 1987년에 개정한 외국인투자법은 매우 급진적이었다. 먼저 외국인이 투자 기업의 지분 100%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윤은 물론이고 기업을 매도한 금액까지 정해진 세금만 물면 본국으로 송금할 수 있도록 소유권을 철저히 보장했다. 낮은 법인세율과 일정 기간 부여되는 면세 혜택도 해외 투자자들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1990년대 들면서 연간 평균 40억 달러 규모의 해외 투자가 베트남으로 밀려들어 온다. 다만 투자자 대부분은 타이완·홍콩·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지에 거주하는 화교 자본이었다. 화교들은 베트남에 사는 친지를 통해 주로 경공업 소비재 기업을 설립해서 호찌민 특별시(과거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를 산업 중심지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글로벌 경제에 편입되기 위한 베트남의 몸부림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아시아 이웃 국가들과 화교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해야 했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소비재 수입국일 뿐 아니라 금융 중심지(국제 유동자금의 상당 부분이 미국을 경유해 여러 나라로 투자됨)다. 더욱이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의 개발자금을 받으려면 사실상 미국의 승인이 필요하다. 베트남은 전쟁 당시 미국인 실종자 수색, 송환 등으로 끊임없이 성의를 표시했다. 1993년 7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IMF의 베트남 개발자금 지원을 허용한 데 이어 다음 해에는 베트남에 대한 상당수의 경제제재를 풀어준다. 이후 펩시,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캐터필러 등 글로벌 기업이 베트남에 진출하더니 1995년 8월엔 미국 국무장관이 하노이를 방문해서 국교 정상화 협정을 조인했다. 양국 간 교역량은 2000년대 들어 10억 달러를 넘어서더니 2005년에는 100억 달러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된다. 이로써 ‘정상 국가’로서 글로벌 경제 시스템에 통합되기 위한 베트남의 시도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베트남의 경제성장률은 도이머이 이후 눈부시게 상승했다. 1991~1997년의 연간 성장률이 무려 8~9%에 달한다. 민간 기업이 법률적으로 인정된 이후 5년여 사이에 사업체가 30만여 개 설립되었다. 농업 생산이 크게 증가하면서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 쌀 수출국으로 성장했다. 같은 시기, 물가인상률도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도이머이 이전에는 50%를 웃돌던 빈곤율이 2000년대 들어서는 20%대 후반으로 개선되기도 했다. 베트남 전문 프리랜서 기자 데이비드 램은 <스미소니언 매거진>(2008년 3월)에 “베트남은 여전히 공산주의의 외투를 걸치고 있으나, 오늘날에는 자유시장 개혁의 피가 자본주의적 심장을 채우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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