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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기계공고 3학년 서정열의 ‘38년’

2018년 05월 20일(일) 제557호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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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고3 학생이었던 서정열씨는 시민군에 참여했다가 계엄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38년이 지난 현재까지 트라우마로 남아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서정열씨(57)는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지금도 수면제 없이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기계공고 3학년이었다. 서씨는 1980년 5월28일 자취방으로 들이닥친 군인들에게 끌려가 육군 31사단 영창에 갇혀 10여 일간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끝나지 않는 5·18 트라우마의 산증인인 서씨를 광주 자택에서 만났다.


ⓒ시사IN 이명익
서정열씨(위)는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되풀이된다. 일베류의 5·18 역사 왜곡과 폄훼에 강력히 대처해달라”라고 말했다.
5·18 때 고등학생이었는데?


전남 벌교가 고향인데 중학교 졸업 후 광주 북구에 있는 전남기계공고로 유학을 와서 학교 근처의 방 7개짜리 자취집에서 생활하다 5·18을 맞았다. 특별히 용감하거나 정의로워서라기보다 대학생 형들이 잔인하게 진압당해 피 흘리는 것을 보고 분노해 참여했다. 그때 모든 광주 시민이 한마음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고교생인데 고향에서 부모가 데리러 오지 않았나?

5월17일 토요일에 쌀·김치 등이 떨어져서 벌교 고향으로 내려갔다. 집에서는 광주가 시끄러워졌다고 올라가지 말라고 했는데 친구랑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5월18일 버스를 타고 광주로 갔다. 화순까지 온 버스가 광주에 못 들어가더라. 걸어서 광주로 들어가는데 시골에 사는 부모들이 광주에서 자녀들 데리고 걸어 나오는 행렬이 보였다. 나는 걷다가 또 중간에 차를 타고 해서 겨우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항쟁 기간 계속 광주에 있었나?

같이 자취하던 대학생 형들이 피투성이가 되고 계엄군이 시민을 죽였다는 말도 나돌았다. 시내로 나오니 시신을 실은 트럭 행렬이 보였다. 나도 시위 차량에 올라타고 다니며 차량 시위에 참여했다. 시민들이 계엄군에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다가 5월21일부터 총이 지급되고 계엄군이 후퇴하고 나서 도청을 중심으로 날마다 분수대 광장 집회가 열렸다.

집회에 매일 참여했나?

자전거를 타고 매일 도청에서 자취방을 오갔다. 도청 분수대 앞 전일빌딩 1층에 걸린 대자보를 보니까 “미국이 부산 앞바다에 항공모함 보내서 광주 시민 시위를 지지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시민들은 승리가 눈앞에 있다고 용기를 얻고 고무되었다. 한편에서는 5월26일부터 계엄군이 들어온다고 소문도 돌았다.

총기 소지하고 시위도 했나?

처음 이틀간은 나도 총기를 받아 시민군에 참여했다. 5월23일부터 수습대책위원회가 도청에서 회의를 열었다. 총기가 많이 풀려 오발 사고 위험이 있으니 학생들은 총을 반납하라고 해서 나도 반납했다. 5월25일부터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자 도청 안에서 강온파로 나뉘더라. 끝까지 싸우자는 쪽은 일반 시민들이었고, 협상으로 나가자는 온건파도 있었다. 그러다가 5월26일 여자와 고교생은 빠져나가라고 해서 나는 그날 저녁 도청에서 나와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튿날 밤 군인들이 자취방을 덮쳤다.

ⓒ임종진
서정열씨가 5·18자유공원에서 시민군을 형상화한 밀랍 인형을 찍고 있다.

군인들이 자취방을 덮친 이유는?

계엄군이 다시 진입한 5월27일 새벽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나서 불안해하던 참에 5월28일 시커먼 군인들이 총 들고 쳐들어왔다. 폭도들이 숨어 있다는 신고를 받았다면서 다짜고짜 집을 뒤졌다. 자취집 주인아주머니가 다 내 자식들이라고 하니까 군인이 권총을 겨누고 군홧발로 차버렸다. 자취생 5명은 맞아서 기절했다. 개머리판으로 찍고 지근지근 밟은 뒤 포승줄로 손을 뒤로 묶은 다음 목을 밧줄로 감았다. 주인집 둘째 아들도 같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그는 이후 정신적인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지금은 망월동 5·18 묘역에 잠들어 있다.

어디로 끌려갔나?

그때 전남대 대학생 형들과 고3 친구들 10여 명이 군용 트럭 2대에 나뉘어 짐칸에 머리 박고 있는데 31사단으로 데려갔다. 남자는 팬티만 입히고 몽둥이질했고, 여학생 3명은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온몸을 한 시간 정도 무차별로 두들겨 팬 뒤 진술서 쓸 종이 한 장씩 나눠줬다. ‘나는 언제 어디서 총을 쏘고 다녔다’고 적어 내라고 요구했다. 총을 쏜 적은 없고 시위만 참여했다고 하니 진압봉으로 머리를 쳐서 피가 솟구쳤다. 총을 숨긴 곳을 대라고 날마다 폭행했다. 10여 일간 폭행과 고문이 계속되었다. 체포 11일째 상무대로 끌고 가 그동안 겪은 일을 발설하지 말라고 교육시키고 훈방했다.

여학생 3명은 무슨 혐의로 끌려갔나?

주먹밥을 시민군에 나눠준 것을 죄로 만들었다. 그때 붙들려간 친구 10여 명 중 3명이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가 사망했다. 후배 2명과 친구 1명이 고문 구타 후유증으로 적응 못하고 트라우마 속에 죽었다. 나도 사회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지금도 수면제를 먹어야 잠이 든다.

5·18 뒤 어떻게 지냈나?

기계공고를 나왔어도 5·18 이후에는 취업이 안 됐다. 1984년 논산훈련소 입대 후 주특기 교육을 광주로 나왔는데 시간만 나면 진압봉으로 폭동 진압 훈련을 했다. 5·18이 생각나 미칠 것 같았다. 그 뒤 기갑학교를 나와 경복궁 수경사 30단에 배속됐다. 거기서 근무하던 중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과 하나회가 경회루에 모여 연회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기회에 죽여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학살 가해자에 대한 울분을 못 참고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니까 부대에서는 나를 국군수도병원 정신병동에 넣어버렸다. 그 뒤 부대에 복귀하지 못하고 의가사 제대했다. 사회에서도 정신적 트라우마로 제대로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해병대 복장을 한 군인 얼굴을 보면 나를 죽일 것 같은 환각에 빠지기도 했다. 직장은 오래 못 버티고 나와서 옮겨 다녔다. 가정생활도 힘들어서 딸 하나 낳고 이혼했는데, 그 딸이 서른 살이다. 그 뒤 재혼해서 아들딸 둘 낳았다. 현재 대학생이다.

5·18 고문 피해 보상은 신청했나?

내가 31사단에 끌려가 고문받고 석방될 당시 신문 기사가 크게 났고, 고교 교장선생님이 내 문제로 인터뷰한 기사가 있었다. 전남대 친구들이 그 서류들을 찾아내 신청해주었다. 구금 일수에 따라 일부 배상금을 수령했다.

최근에는 어떻게 트라우마를 달래며 지내나?

해마다 5월이 되면 5·18자유공원에 있는 상무대 영창에서 5·18구속부상자회 주최로 영창·법정 체험 행사를 한다. 나를 포함해 항쟁에 참여했던 이들이 군복을 입고 전국 각지에서 온 체험객들에게 이야기한다. “이런 일이 비단 광주만이 아니다. 강원도에서도 이런 일 벌어졌으면 주민이 가만히 있지 않고 똑같이 대응했을 것이다”라고 하면 대부분 공감을 표한다. 한때 옛 도청 건물에서 야간 경비 근무를 했다. 밤에 올라가서 보면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쳐들어올 때 얼마나 무서웠을까 눈물이 난다. 박근혜 정부 때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공사하며 도청 정문을 부숴버렸는데, 우리가 가서 강력히 반대해 다시 원형대로 복원 공사 중이다.

끝으로 5·18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5·18 당시 망월동에 묻히는 시신 사진에 ‘홍어 택배 왔다’고 글을 올린 일베 회원 재판에 나도 네 번이나 참석했다. 하도 분해서 직접 가 재판을 보았다. 북한군 특수부대원 600명이 내려와 5·18을 일으켰다는 사람들을 가만두고 보는 이 나라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독일에서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면 원칙적으로 처벌하는 ‘홀로코스트 부인 처벌법’이 시행되고 있다던데, 일베류의 5·18 역사 왜곡과 폄훼에 강력히 대처해달라.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되풀이되니 제발 기억해달라.

ⓒ서정열
서정열씨는 고통의 기억과 대면하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처음에는 분노가 일고 무서웠지만 용기를 냈다. 고등학교 시절 체포되어 끌려갔던 31사단 담장.
ⓒ서정열
그는 계엄군 재진입 하루 전날 전남도청을 빠져나왔다. “전남도청 진압 전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죽기 전에 창문 너머 바깥을 보면서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서씨가 카메라에 담은 옛 전남도청.
ⓒ서정열
ⓒ서정열
ⓒ서정열
ⓒ서정열
“예쁘고 아름다운 게 세상천지에 얼마나 많은지. 사진이란 게 참 재미나요. 나도 내가 재미있어 허는 모습 보믄서 새삼 놀라기도 하고….” 그가 카메라에 담고 싶어 한 것은 자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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