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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가 김일성주의를 이겼다

2018년 05월 24일(목) 제557호
장정일 (소설가)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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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 관련 서적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북한 관련 서적은 꾸준히 신간이 나오고 있는 분야이지만 좀체 판매고가 오르지 않는다. 이 때문에 한국 사회는 북한 연구자의 정통한 지식보다 진영 논리에 아부하는 문외한들의 ‘북한 괴담’에 쉽게 휘둘려왔다. 진영 논리의 거간꾼들에게 계속 북한 담론을 맡겨놓을 것인가. 북한 관련 서적이라면 북핵·주체사상·통일과 같은 거시적이고 정치적인 책만 있는 줄 알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주제의 책이 나와 있다. 무거운 주제가 부담스러운 독자들은 박태상의 <북한 소설에 나타난 여성의식과 성 역할: 김정일 시대와 김정은 시대의 비교 고찰> (한국문화사, 2018), 전영선·한승호의 <NK POP: 북한의 전자음악과 대중음악>(글누림, 2018), 박영자의 <북한 녀자: 탄생과 굴절의 70년사>(앨피, 2017) 같은 책에 눈독을 들일 수도 있겠다.

북한이라면 자동 기술적으로 김일성주의를 떠올리게 된다. 김일성주의를 완곡하게 또는 미학적으로 윤색한 단어가 1980년대 학생운동을 초토화한 주체사상이다. 현재 자유한국당과 보수 언론은 문재인 정권을 ‘주체파에 접수된 정권’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상식 있는 대다수 한국인들은 이런 억지에 동의하지 않지만 북한이 김일성주의 국가라고 오해하는 사람들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번에 소개할 책 세 권은 ‘북한=김일성주의’라는 등식이야말로 대표적인 북한 괴담이라고 말한다. 주체의 본거지인 북한에서는 주체가 사라진 지 오래인데 말이다.

헤이즐 스미스의 <장마당과 선군정치: ‘미지의 나라 북한’이라는 신화에 도전한다>(창비, 2017)는 김일성주의를 “모든 일상을 국가가 오만하게 통제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김일성주의 기획 아래서 국가가 통제하지 않는 식량·고용·정보 등은 그야말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김일성주의는 1990년 중반, 적게는 20만명에서 많게는 300만명으로 추산되는 기근 사태(북한의 공식 용어로는 ‘고난의 행군’)로 끝장났다.

ⓒ이지영 그림

“북한은 여전히 권위주의적이지만, 정권은 1990년대 중반에 주민들 일상생활을 통제하던 전방위적 능력을 상실했다. 경제위기가 김일성주의 모델을 붕괴시켰고, 정부는 주민들에게 더 이상 생활임금을 지불할 수 없었으며, 식량을 포함한 기본 생필품을 제공하지도 못했다. 그때 이후로 개인들과 그 가족들은 생존의 방편으로 시장 기회에 접근하기 위해 스스로 경제적 결정을 내리고 자신의 수완에 의존해야 했다. 결과는 생존주의 문화와 함께 경쟁과 자조라는 자본주의 규범에 의해 규정된 사회로의 변화였다.”

김일성주의란, 조선노동당 정부가 인민의 경제와 식량을 총괄해서 책임지는 대신, 인민은 조선노동당을 북조선 유일의 권력 주체로 인정하고 충성을 바치는 일종의 사회계약이다. 그런데 북한을 지원해주던 소련이 1991년 패망하고 1994년과 1995년에 연속된 홍수로 1994~1998년 심각한 대기근이 벌어지면서 북한식의 사회계약은 무효가 되었다. 영국 출신 전·현직 언론인 대니얼 튜더와 제임스 피어슨이 함께 쓴 <조선자본주의공화국> (비아북, 2017)과 <시사IN>의 경제통 이종태 기자가 쓴 <햇볕 장마당 법치: 북한을 바꾸는 法>(개마고원, 2017)도 똑같은 의견이다.

“1990년대 중반의 끔찍한 대기근이 일대 전환점이었다. 정부가 규칙적으로 배급하던 식료품은 이 기간 중에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그 시기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당시 경험에서 얻은 교훈은 일종의 자조였다.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자조가 아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기 위한 자본주의를 통한 자조였다. 사유재산과 사적 거래는 여전히 불법이지만 대기근 이후 북한에서 경제를 지배하는 규칙은 단 하나다. 규칙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대니얼 튜더·제임스 피어슨).” “이 시기부터 북한에서는 시장경제가 ‘밑에서부터’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한다. 인민들이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시장으로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다. 2017년 중반 현재는, 북한 경제 전반에서 시장의 비중이 너무 커져서 과거의 사회주의 시스템으로 회귀를 꿈도 꾸기 힘들 정도다(이종태).”

시장 발달해야 소유권·인권 개념 생겨나

<햇볕 장마당 법치> 이종태 지음, 개마고원 펴냄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식 개방을 몇 번이나 시도했다가 경제 개방이 체제를 위협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다는 여러 가지 정황증거가 있다. 하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경제 개방을 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체제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사실은 북한이 핵만으로 체제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깊이 고민하도록 이끌며, 4·27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이 좀 더 적극적으로 정상 국가화를 꾀할 수밖에 없는 난관을 보여준다. 현재 북한에서는 집과 땅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사고판다. 각기 세 권의 책에서 지은이들은 북한 정부의 정치철학과 정치적 수사에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적 수사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북한 경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까지 시장경제로 전환되었다(헤이즐 스미스)”라고 입을 모은다.

어떻게 보면 북한 정권은 주민들이 생존 수단으로 개설한 장마당(시장)을 약간 열어놓음으로써 두 가지 이익을 얻는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북한 정권 혼자서 감당이 불가능한 경제(식량) 문제를 북한 인민들과 함께 나누어 지게 됨으로써 자신의 역량을 다른 곳(예를 들어 국방)으로 돌릴 여유를 갖게 되었다. 둘째, 먹고살기 위해 혹은 좀 더 잘살기 위해 북한 인민들이 장마당에 몰두함으로써 북한 인민들의 저항의식을 잠재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개방으로는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북한의 정보 혁명을 막을 수 없다. 현재 북한에서 사용되는 개인 휴대전화는 300만 대를 넘으며 컴퓨터는 여섯 명에 한 대꼴로 보급돼 있다. 여러 가지 보안 장벽이 있지만, 기술의 장벽은 총칼만큼 완벽하지 못하다.

남한 사람들이 ‘중국식 개방’을 권할 때마다 북한 고위 인사들은 ‘북한식 개방’이라고 용어를 정정해준다. 용어야 어쨌건 북한식 개방은 박정희의 국가 주도형 자본주의나 현 중국 공산당의 관치 자본주의와 다르지 않은 형태가 될 것이다. 이제 남한이 해야 할 몫은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 체제를 보장하도록 거들면서, 북한의 경제 개방과 발전을 돕는 것이다. 시장이 발달해야 비로소 소유권과 함께 인권이라는 개념이 생겨날 수 있으며, “이런 과정에서 시장과 함께 민주주의와 인권을 발전시키는 법 제도적 변혁들이 이루어지게 된다(이종태).” 임진강에서 날려 보내는 ‘삐라’로는 북한 인권을 함양하거나 체제 전복을 일으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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