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는 더없이 정교한데, 이를 통해 표현되는 밴드의 기세는 참으로 호방하다. 그들을 설명할 때 관습적으로 사용되어온 표현이 하나 있다. 바로 ‘한국적 록’이다. 그러나 아시안체어샷은 2집 〈이그나이트(Ignite)〉로 자신들이 이 납작한 수사보다 훨씬 더 큰 밴드임을 증명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첫 곡 ‘뛰놀자’만 들어봐도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구성진 도입부를 지나 시원하게 폭발하는 지점에 도달하면, 이 밴드가 얼마나 탄탄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 단박에 느껴진다. 이어지는 ‘빙글뱅글’ 역시 마찬가지다. 밴드 하모니에서 호흡을 조절하는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좋은 곡이다. 특히 1분25초 즈음부터 나오는 패턴을 나는 정말이지 애정한다. 그 뒤에 들을 수 있는 기타 솔로 역시 과하게 길지 않고, 핵심만을 정확하게 짚어나간다. 이렇게 음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도 〈이그나이트〉는 높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즉, 그들은 단지 기술의 과시를 위해 음악하지 않는 하드 록 밴드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것과 관련해 얼마 전 소셜 미디어에서 봤던 에피소드를 하나 얘기해본다. 아도이라는 밴드가 있다. 간단하게, 1980년대 뉴웨이브를 현대적으로 변용해 연주하는 밴드다.

하드 록 밴드 아시안체어샷은 기술의 과시를 위해 음악하지 않는다.

기타를 멘 누군가가 아도이의 공연을 보면서 이렇게 툴툴거렸다고 한다. “내가 더 잘 치겠다.” 이게 바로 기술 우선주의가 빠질 수밖에 없는 함정이다. 밴드 음악을 개인의 기술적 역량으로만 파악하려는 태도 말이다. 물론 록 역사상 이런 관점이 아주 잘 먹히던 시절이 분명히 존재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30~40년 전인 1970년대와 1980년대다. 

1980년대까지는 한국이건 해외건 연주를 못하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이 시절 기술적 완성도라는 것은, 비유하자면 ‘상징적 아버지’와도 같았다. 다들 그래야 하는 줄 알고 밤새 연습해서 자신이 가진 테크닉을 불살랐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친구들과 ‘누가 더 기타를 빨리 치네’ ‘누구 테크닉이 더 뛰어나네’ 하면서 (돌이켜보면) 아무 의미 없는 논쟁을 벌였던 추억이 남아 있으니까. 배철수 DJ가 한 인터뷰에서 “어느 순간 산울림의 음악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닫게 되었다”라고 말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한 곡을 꼽으라면 ‘산, 새 그리고 나’

‘개성과 애티튜드’를 중시하는 1990년대가 개막하면서 ‘아버지’는 몰락하고, 포스트모던이 도래했다. 대중음악에서도 취향의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1990년대에도 끝내주는 뮤지션과 밴드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확실히 날이 갈수록 ‘기술적 완성도’와 ‘예술적 감수성’을 겸비한 경우를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시안체어샷은 바로 이 두 가지 모두를 체화하고 있는 드문 밴드다.

굳이 한 곡만 꼽아야 한다면 ‘산, 새 그리고 나’를 선택하겠다. 싱글로 먼저 발매되어 한국대중음악상 후보에까지 오른 곡이다. 인연이 있어 나는 발매 전에 들을 수 있었다. 음악 듣기를 직업으로 택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작은 기쁨일 것이다.

기자명 배순탁 (음악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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