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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문리 주막에서 도보다리 회담까지 67년

2018년 05월 31일(목) 제558호
김형민 (SBS CNBC PD)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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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문점은 수많은 사건과 사연을 간직한 채 오늘에 이른다. 경기도 파주 널문리에 있던 작은 주막은 휴전 협상이 이뤄지는 장소였다. 유엔군과 공산군 간 기 싸움이 수시로 펼쳐졌다.

1950년 6월25일 시작된 전쟁은 3년하고도 1개월을 끌었어. 그런데 1951년 봄부터는 휴전 얘기가 심심찮게 흘러나왔지. 유엔군도 공산군도 결정적인 승리로 한반도를 통일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거야. 1951년 7월 마침내 개성에서 첫 휴전 협상이 열린다. 문제가 많았어. 북한 점령 지역이었기에 유엔군이 평화를 상징하는 흰 깃발을 달고 가면 그걸 촬영해서 “백기를 든 제국주의자들”로 선전하는 식이었으니까. 유엔군 쪽도 발끈해서 신경전을 벌였지. 한 번은 공산군과 유엔군 측이 자그마치 2시간11분 동안 말 한마디 없이 눈싸움만 하는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어.

ⓒNARA
1953년 4월9일 판문점에서 공산군과 유엔군이 설전을 벌이는 모습.

이런 분위기에서 협상이 잘될 리가 없지. 그래서 선택된 곳이 개성과 문산 사이의 중립지대인 당시 경기도 파주군 널문리라는 곳이었어. 널문리에는 작은 주막이 있었는데 판문점(板門店)은 이 널문리 가게를 한자로 번역한 거야. 판문점이라는 이름이 알려진 뒤에 이런 얘기가 돌았단다. 그곳은 숙명적인 장소라고. 왜냐면 세 글자 모두 한자 획수가 8획이었기 때문이야. 글자 셋에 8획, 즉 분단의 대명사인 38선이 연상되지 않니. 숙명적인 땅이든 그저 우연의 일치이든 판문점은 휴전 협상 2년과 정전협정 후 65년간, 수많은 사건과 사연을 간직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어. 앞으로 몇 주간 그 얘기를 들려주려 해.

휴전 협상은 북한군 대표와 중공군 대표, 그리고 유엔군 대표 사이에서 이뤄졌어. 한국군의 작전권이 유엔군에 귀속돼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지. 한국군 장교도 연락 장교로 판문점 휴전 회담에 참석하곤 했는데 우리말을 전혀 쓰지 못했어. 유엔군 소속 장교의 공용어는 영어였으니까. 하루는 공산군 측에서 거친 항의를 해왔지. 유엔군 공군기가 판문점 북쪽에 기관총을 쏴대서 어린이가 죽었다는 거야. 미군 장교가 현장 조사를 해야 하지만 마침 자리를 비운 터라 한국군 연락 장교 이수영 대령이 대신 가야 했지. 그런데 슬프게도 ‘English only’. 

“우리 공군기가 귀측을 침범한 적이 없고 어린이가 사망한 사건도 우리 책임이 아니오.” 이 얘기를 너랑 비슷한 영어 실력으로 읊었을 거야. 그런데 더욱 웃지 못할 코미디가 벌어졌어. 이수영 대령의 ‘통역관’은 연세대학교를 세운 선교사 언더우드의 손자 리처드 언더우드(한국명 원득한)였던 거야. 그는 전쟁 당시만 해도 그렇게 한국어가 능숙하지는 않았다고 해. 한국인의 엉터리 영어를 미국인이 서툰 한국어로 번역하는 모습이 얼마나 민망했겠니.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인민군 장교 장춘산 대좌가 야유를 보내. “어이 이 대령, 우리말 다 까먹었소?” 이수영 대령은 또 더듬더듬 영어로 답했어.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라 우리말을 하고 싶을 때는 우리말로 하고, 영어로 하고 싶으면 영어로 합니다.” 아빠는 이수영 대령이 이 말을 어떻게 했을지 짐작이 가. “위 아 프리 컨트리, 이프 위 원트 코리언, 위 스피크 코리언, 이프 위 원트 잉글리시, 위 스피크 잉글리시.” 장춘산 대좌는 아주 진한 욕설과 함께 가래침을 뱉고 돌아섰다고 해.

이런 ‘대결’은 판문점에서 수시로 펼쳐졌는데 그 가운데 인민군 대표였던 남일 대장이라는 이의 에피소드가 유명해.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유명한 골초였던 남일에게 회담장에서 흡연 중 멋있게 보이라고 파이프를 선물했다고 해. 미군 대표 조이 제독이 담배를 권하며 이 담배는 파이프가 필요 없이 그냥 피우는 고급 궐련이라고 하자, 남일은 그것을 뜯어서 가루를 파이프에 담아 피워댔어. 그러면서 한마디. “나는 지금 미국을 태우고 있소.”

인민군 대표 남일은 전라도 강진 출신일까

ⓒ위키백과
휴전 협상 당시 인민군 대표였던 남일은 군인이자 외교관이고 교육 전문가이자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남일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출신이야. 고려인은 소련 땅 연해주에 살다가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송두리째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옮겨진 조선인들을 말해. 남일은 거기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했는데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면서 소련군 장교로 입대했어. 이 사람의 소련군 참전 이력은 가히 세계사적이야. 우선 “미국 정보기관이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소련군 대위로 스탈린그라드에서 싸웠고 전후 소련군이 폴란드를 지배할 때 사단 참모장을 지낸 자”(<경향신문> 1982년 2월23일)였지.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의 반환점 같은 사건이었어. 단일 전투에서 소련 민간인과 양국 군인을 합쳐 200만명이 죽어갔다면 알 만하지? 소련군은 지옥 같은 시가전 끝에 독일군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단다. 남일은 그 지옥의 한복판에 있었어. 그뿐이 아니야. 남일은 1943년 7월, 무려 탱크 6300대가 서로 엉키고 맞붙으며 불을 토하고 피를 뿜었던 ‘세계사상 최대 전차전(戰車戰)’ 쿠르스크 공방전에도 참가했고,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도 그 공을 인정한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참모장으로서 바르샤바 작전과 베를린 점령 작전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야. 아마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치열한 전장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일 거야. 그가 회고록이라도 남겼더라면 동서양과 이념을 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지도 몰라.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외교학을 강의한 적이 있다”(<경향신문> 1963년 12월16일)라는 기사에서 보듯 그는 군인이자 외교관이었고 교육 전문가이자 엘리트 지식인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파란만장한 남일의 삶은 뜻밖에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아. 특히 그의 유년 시절은 완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어. 또 1976년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뒤 남일의 행적은 북한에서도 거의 지워져버렸단다. 가장 신기하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 하나. 전라도 강진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 인민군 대장 남일이 강진 출신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

해방 직후 강진군 병영면 면장을 지내기도 한 남주익이라는 이의 장남 남정욱이 일본 유학 이후 행방이 묘연했는데 휴전 회담 기사에 실린 남일의 사진을 보고 이웃 사람들은 대번에 그가 남정욱이라고 지목했다는 거야. 사실 남일은 특출한 미남이야. “어쨌건 그는 미남자다. 탄력 있는 근육, 적당하게 탄 얼굴, 통찰력을 말하는 두 눈, 강한 의지력을 상징하는 일자로 다물어진 입이 인상적이다. 재치 있는 두 볼, 균형 잡힌 얼굴, 호색적인 미남이다”(<동아일보> 1951년 7월25일)라고, 여차하면 적군 대장을 찬양했다고 잡혀갈지 모를 기사가 나왔을 정도로 미남이니 쉽게 알아보긴 했을 거야. 그러나 전쟁 통에 ‘괴뢰군 총참모장이 우리 아들이요’ 했다가는 온 가족이 몰살당할 수도 있었으니 소문은 쉬쉬 묻히고 말았어.

판문점의 이름은 이처럼 기구하면서도 미스터리한 사연으로 이리저리 얽혀 있단다. 한국군 장교의 ‘콩글리시’를 미군 통역관이 혀 꼬부라진 우리말로 통역해 인민군 장교에게 전하는 코미디가 펼쳐지고, 다 큰 어른들이 두 시간 넘게 눈싸움을 하며 맞서기도 했지. 북한군 대표 중 하나였던 이상조는 부산 동래 출신이었고 남한 측 참관자였던 백선엽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이었어. 둘은 자신의 고향 사람들과 적대해서 싸운 셈이지. 거기에 북한 대표 인민군 대장 남일. ‘세계사적 전투’의 경험자인 그는 제대로 된 전기 하나 남기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반도의 반대편 사람들 중 일부는 그를 자기 고향 사람이라 여기고 있으니 어이없지? 하지만 그 후 수십 년간 판문점에서 일어난 일들에 비하면 대수로울 것도 없어. 판문점의 기묘한 역사는 막 시작된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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