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1일 오후,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대법원 주변에 1800여 명의 시위대가 한 중년 여성을 에워싸고 모였다. 그 여성은 시위대에게 “오늘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크고 강고한 적과 맞서기 위해 뭉쳐야 한다”라고 연설했다. 그녀는 이 연설 직전 필리핀 대법원장 자리에서 쫓겨난 마리아 루르데스 세레노(57). 세레노가 필리핀 최초의 여성 대법원장으로 임명된 것은 2012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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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노가 파면된 것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과의 끊임없는 불화 때문이었다. 2016년 6월 대통령에 취임한 두테르테는 선거운동 당시 “모든 범죄자를 처형하겠다. 마닐라 앞바다는 피바다가 될 것이다”라고 했던 ‘공약’을 실천에 옮겼다. 마약 거래 혐의만으로 구속영장이나 재판 없이 시민을 억류·고문하거나 심지어 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두테르테의 비법(非法) 사설 부대라 할 수 있는 민간 무장집단(자경단)이 마약범죄 소탕을 명분으로 사사로운 원한을 풀거나 대통령의 정적을 제거한다는 증언까지 나온다. 인권단체들은 두테르테식 ‘마약과의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이 1만2000명을 웃도는 것으로 추산한다.

대법원장이던 세레노는 이런 정부에 대해 법과 인권을 존중하라고 항의하다 대통령의 노여움을 샀다. 두테르테가 공직자들이 포함된 마약 거래 용의자 명단을 언론에 공포하면서 ‘자수하지 않으면 체포하고, 저항하면 사살하겠다’고 위협하자, 세레노는 “혐의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명단을 유포하는 등 사법 절차를 위배했다”라고 맞섰다. IS(이슬람국가) 토벌을 명분으로 민다나오 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에 대해서도 그녀는 “정적 탄압에 악용될 수 있다”라고 거세게 비판했다.

두테르테 정권은 2017년 하반기부터 의회의 동맹자들과 함께 ‘세레노 몰아내기’에 돌입했다. 지난 3월 하원 사법위원회는 “세레노가 공직자 소득신고서를 제대로 작성하지 않은 데다 공공경비까지 남용했다”라며 대법원장 탄핵안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했다. 필리핀 법률상 의회 표결로 대법원장 파면이 실현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두테르테 정부의 법무차관은 ‘대법원장 파면 청원서’를 대법원에 냈다. 동료 재판관들이 표결로 신속하게 쫓아내라는 의미였다. 두테르테는 지난 4월 공중파로 방송된 대중 연설에서 세레노를 지목하면서 “당신은 나의 적이다. 곧 대법원에서 쫓아내겠다”라고 말했다. 이런 와중에도 세레노 대법원장은 각종 강연과 연설을 통해 두테르테에 저항했다. “인권과 법이 무시당할 때 가장 큰 피해자는 가난하고 무지한 시민들이다. 침묵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자.”

결국 동료 대법원 재판관 14명 중에 8명이 세레노를 파면하는 데 찬성했다. 반대 의사를 표명한 마빅 레오넨 대법원 재판관은 “법을 이용한 혐오스러운 행위다. 기각되어야 했다”라고 한탄했다.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전례 없이 극악한 행위”라고 논평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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