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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분단에 찢겨버린 삶

2018년 06월 05일(화) 제559호
김형민 (SBS CNBC PD)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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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이 끝나고 남과 북이 아닌 제3국을 택한 76명의 포로가 있었다. 이들은 반공 포로를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거나 빨갱이 사냥을 벌이는 현실에 염증을 느꼈다. 분단과 대립의 공포는 중립국에 다다를 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휴전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고도 한국전쟁은 장장 2년을 더 끌었단다. 휴전회담이 마냥 길어진 건 크게 두 개의 험한 고개가 있었기 때문이야. 먼저 휴전선 설정. 북한과 중국, 즉 공산군 측은 전쟁 전 삼팔선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우겼고 삼팔선 이북을 꽤 넓게 점령하고 있었던 유엔군 측은 현재의 전선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뻗댔지. 이 문제가 해결되자 또 하나의 난제가 육중하게 솟아올랐어. 바로 포로 교환 문제였다. 북한은 전쟁 중 남한을 ‘해방’시키는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남한 청년을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입대시켜 총알받이로 써먹었고, 원래 기독교 세가 강했던 지역이라 북한 출신임에도 반공적 성향을 지닌 이들이 많았지. 즉 남한군에 붙잡힌 ‘인민군 포로’가 됐을망정, 북한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얘기야. 또 ‘중공군 포로’ 가운데에도 타이완으로 쫓겨간 국민당 군 출신이 상당수였지.

ⓒ연합뉴스
1953년 4월22일 판문점에서 공산군과 유엔군 사이에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다.

머리를 싸매던 유엔군 측은 1953년 5월25일 이런 제안을 하게 돼.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을 중립국 위원회의 심사를 받아 자유의사로 거취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자.” 공산군 측도 대충 이에 동의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 포로들은 대한민국으로 와야 한다며 그들을 일제히 석방해버렸어. 약 3만500명 가운데 2만7000여 명이 수용소 문을 박차고 나왔지. 미국도 영국도 북한도 중국도 펄펄 뛰었지만, 더 이상 이 문제를 질질 끌고 갈 기력은 없었어.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됐고 중립국 군대 관할하에 양측의 설득 작업을 거쳐 포로들은 자유의사를 통해 갈 곳을 정하기로 했어.

1953년 9월 송환 거부 포로들을 관할할 중립국 인도의 1개 여단이 입국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인도군의 판문점행 기차 이동을 방해하자 헬리콥터를 타고 판문점으로 날아왔지. 전국에 산재해 있던 송환 거부 포로들 2만2000여 명도 판문점 근처에 집결했지. 오늘날 우리가 보는 판문점은 당시 한국에 왔던 인도군의 막사와 포로 교환 장소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란다. 인도군의 관할 아래 양측의 치열한 설득을 거쳐 포로들 대부분은 남과 북, 그리고 중공과 타이완을 택했지만 그래도 남은 사람들이 있었어. 중립국으로 가겠다는 사람들이었지. 그 가운데 중국 사람 열두 명을 제외한 ‘코리안(Korean)’은 76명이었어. 인민군 출신은 74명, 한국군 출신은 2명.

이들은 왜 중립국을 택했을까. 이유는 여러 가지일 거야. 이를테면 어느 인민군 출신은 ‘조선’에 산 것이 전쟁 기간뿐이었다고 해.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공산당 군대인 팔로군의 일원으로 일본군과 싸웠고, 중국 통일을 이룬 마오쩌둥이 휘하에 있던 조선족 사단 몇 개를 통째로 북한에 양도함에 따라 인민군 군복으로 갈아입고 압록강을 건넜던 거야. 조선인이되 중국에서 산 세월이 길었던, 조선어보다는 중국어가 더 익숙했을 현대사의 불운아라고나 할까. 그에게 북한이란 남한만큼이나 생경한 곳이었겠지.

또 앞서 말했듯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지긋지긋한 친공(親共)과 반공 대결의 후유증도 있었어. 친공 측이 장악한 수용소에서는 반공 포로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반공 측이 장악한 수용소에서는 빨갱이 사냥이 벌어지는 일이 무시로 벌어졌던 상황이 어느 한쪽을 택하는 것을 망설이게 했을 것도 같아. 전쟁이 멎긴 했지만 또 언제 포화가 불을 뿜고 서로 잡아먹겠다고 달려들지 모를 한반도를 떠나고 싶은 마음, 이해가 가지 않니?

인민군 출신이 상당수였지만 76명 대부분은 가고 싶은 나라로 미국을 희망했어. 그러나 안타깝게도 미국은 참전국으로 중립국이 아니었지. 그들은 일단 인도로 가야 했어.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올라서도 분단과 대립의 공포는 지속됐어. 중립국행이라는 목표 아래에서는 하나였으나 76명 포로들도 인도파와 남미파로 갈린 거야. 신생국 인도는 친공 성향을 보였고, 남미의 중립국을 희망한 포로들은 인도를 선택하겠다는 포로들을 빨갱이로 보았다는구나. 그 두 집단은 서로 100m 내에 접근하지 않는 식으로 ‘분단 체제’를 만들었다고 해.

ⓒ연합뉴스
1994년 3월9일 중립국 브라질에 정착했던 인민군 포로 김남수씨(왼쪽에서 두 번째)가 41년 만에 귀국했다.

그 ‘대결’은 1954년 2월21일 인도 마드라스 항에 도착하면서 일단 끝났지. ‘인도파’들은 즉시 인도 남부로 보내져 기술 교육 등을 받았지만 나머지 ‘남미파’들은 다시 한번 기나긴 기다림을 겪어야 했어. 포로 아닌 포로로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한 이들 가운데 몇 명은 북한으로 귀환하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소망하던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으로 이주하게 됐지. 그들 앞에 펼쳐진 삶이란 어느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파란만장한 여정이었을 거야.

“전쟁의 참상을 겪지 않고 살아보고 싶었다”

1933년생 김남수라는 사람은 중립국 브라질에 정착했지만 자신을 조센징이라고 부르는 일본인을 칼로 찔러 살해하고 10년이 넘는 감옥살이를 해. 출옥 후에는 중국 식당에서 종업원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또 총을 쏘고 말았지.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지만 또다시 감옥행을 피할 수 없었어. 그즈음 정신을 놓아버린 그는 근 27년 동안 감옥과 정신병원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는 1993년 방송된 <76인의 포로들>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한국에 알려졌고, 김수환 추기경의 주선으로 1994년 3월 한국에 들어오게 돼. 무려 41년 만의 귀환.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땅이 너무 좁아 안 되겠다 싶어서 땅이 넓은 미국이나 브라질, 인도 등 큰 나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전쟁의 참상을 겪지 않고 살아보고 싶었고 성공하고 싶었어요.” 1933년생이니 당시 나이 예순둘, 얼마든지 새로운 삶을 살 나이였으나 심신이 모두 망가져 있었고 결국 충북 음성의 장애인 시설 ‘꽃동네’에 들어가 생활할 수밖에 없었어. 그는 “나 없이는 통일이 안 된다”는 과대망상과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다”는 피해망상을 두루 가지고 있었다는구나.

그는 강원도 고성 사람이야. 애초에 그는 인민군에 입대한 것도 아니었어. 전쟁 당시 열일곱 살 중학생이었던 그는 그저 인민군에 끌려가기 싫어서 숨었다가 국군에 덜미가 잡혔고 바로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던 거야. 부모는 그가 왜 사라졌는지도 모른 채 돌아가셨겠지. “땅 넓은 곳”을 찾아 성공하고 싶었던 스무 살의 청년은 태평양과 인도양과 대서양을 돌아 41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지만, 그에게 고향은 없었어. 그가 마음 편히 몸을 누일 땅은 그의 고향 바다로부터 머나먼 충청도 산골의 꽃동네뿐이었지. 2015년 2월 김남수씨는 여든세 살로 한 많은 세상과 이별했단다.

김남수씨가 타계하고 얼마 뒤, 역시 중립국 선택 포로 출신으로 브라질에 정착해 살던 김명복씨가 61년 만에 한국에 왔어. <리턴 홈>이라는 그의 기구한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팀과 함께였지. 그는 왜 중립국을 택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판문점 수용소에 있던) 한 텐트에서 지냈던 동료가 ‘고향에 가고 싶다’는 잠꼬대를 했다가 맞아 죽었어…. 포로가 되는 것 자체를 죄로 여기던 북한도, 고향 가고 싶다는 말에 맞아 죽는 남한도 선택할 수 없었지(<한겨레> 2015년 8월11일).”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판문점은 어떤 땅이었을까. 다큐멘터리 <리턴 홈>은 그가 고향인 평북 용천에 돌아가야 완성되었을 텐데, 북한 당국은 여러 차례의 방문 요청에도 대답이 없었다는구나. “부모님의 뼈라도 만져보고 싶다”는 그의 소원은 이뤄질 수 있을까. 아니 혹시 벌써 이뤄지지 못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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