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28일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을 위한 전쟁과 평화 자료관’에서 권윤덕 작가의 〈꽃 할머니〉 일본어판 출판 기념행사가 열렸다. 계획대로라면 〈꽃 할머니〉는 2010년 6월 한국을 시작으로 중국과 일본에서 출판됐어야 하지만 일본에서는 무산됐다. 이 책은 ‘한·중·일 평화 그림책’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이 시리즈는 2005년 10월 다시마 세이조, 하마다 게이코 등 일본인 그림책 작가 4명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작가들은 일본이 아시아 각국에 저지른 침략과 미진한 국가 차원의 사죄 및 배·보상에 항의하고 싶었다. 그림책으로 세계의 아이들에게 평화의 소중함을 전하자는 일본 작가들의 제안에 한국과 중국 각각 4명의 작

ⓒ㈔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심달연 할머니가 꽃누르미(압화) 작업을 하고 있다. 심 할머니는 2005년부터 압화 작품을 만들어 평화 메시지를 전했다.
가가 뜻을 모았다. 한·중·일 그림책 작가 12명의 교류가 2년 동안 이어졌고, 2007년 8월 3개국에서 각자의 언어로 그림책 12권을 공동출판하기로 하고 출판사까지 정했다. 한국은 사계절, 중국에서는 이린(譯林) 출판사가 기획에 참여했다. 일본에서는 1957년에 설립되어 어린이책 분야에서 명성이 높은 도신샤(童心社)가 출판을 맡기로 해 화제가 되었다. 2007년 11월 중국 난징에 3개국의 작가와 출판사 편집자들이 모여 일주일간 기획회의를 했다. 이 자리에서 권윤덕 작가는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구상을 발표해 다른 작가들로부터 뜨거운 격려를 받았다. 2008년 5월 서울에서 세 출판사는 ‘한·중·일 평화 그림책’을 공동출판한다는 합의서까지 나눴다.

그러나 2010년 초 도신샤는 〈꽃 할머니〉 출판을 포기했다. 〈꽃 할머니〉의 완성본을 본 뒤 다른 11권은 몰라도 이 책만은 어렵겠다며 출판 연기를 통보했다. 2007년 11월 난징 회의를 끝낸 뒤 세 나라 작가들과 편집자들이 나눈 ‘지난날을 정직하게 기록하고, 오늘의 아픔을 서로 나누며, 평화로운 내일을 위해 연대하자’는 결의가 무색해졌다.

도신샤의 의지를 꺾은 것은 ‘공포’였다. 도신샤는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그림책을 출판할 경우 우익들의 표적이 될까 두려웠고, 실제로 우익들은 출판사로 협박 전화를 걸어댔다. 2006년 들어선 제1기 아베 정권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부정하고, 특히 조선인 ‘위안부’의 강제 연행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재일 특권을 허락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이하 재특회)’ 등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조금이라도 시비의 여지가 있으면 그걸 빌미로 삼아 중상과 비방을 해댔다.

〈꽃 할머니〉에서 문제가 된 것은 적확하지 않은 ‘꽃 할머니’ 심달연의 증언이었다. 고 심달연 할머니(2010년 12월 작고)는 언제 어떻게 위안소로 끌려가 어떻게 한국으로 돌아와 어디서 지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심 할머니는 그 끔찍한 폭력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해 오랫동안 ‘기억을 지웠다’. 그래서 심달연 할머니가 끌려간 시기, 끌려간 위안소의 위치와 같은 세세한 부분이 일본 정부나 군이 남긴 터무니없이 적은 사료와 어긋났다. ‘위안부’와 관련된 모든 것이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불완전한’ 증언을 모델로 삼은 책, 게다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그림책은 적절치 않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2013년 9월 ‘겁을 먹고’ 알아서 ‘자숙’한 도신샤는 〈꽃 할머니〉 출판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고로컬러지난 4월 일본 출판사 고로컬러에서 출간된 그림책 〈꽃 할머니〉.
‘왜 그렇게 기억하고, 왜 그 기억을 지웠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어떻게 볼 것인가? 유일한 ‘피해 증거자료’인 증언의 일부를 ‘남겨진 공식 문서’로 검증할 수 없다며 그 증언 모두를 거짓으로 몰고, 피해자를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는 게 정당한가?

권윤덕 작가는 많은 피해자 증언 중에서도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이 생생하게 다가와 모델로 삼았다. 권 작가는 〈꽃 할머니〉에서 심달연이라는 ‘위안부’ 피해자의 기억을 작품의 축으로 삼지만, 그 기억을 한국 사회 맥락 속에서 그린다. 피해자의 기억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가 아니라 왜 그렇게 기억하고 왜 그 기억을 지웠나가 더 중요하다. 심 할머니의 누락된 기억과 명확하지 않은 기억 그 자체가 일본군 위안소에서, 살아 돌아온 한국 사회에서, 그가 겪은 ‘피해’다.

1927년 경북에서 태어난 심달연 할머니는 열세 살 무렵 언니와 함께 들에서 나물을 캐다가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다. ‘위안부’ 일을 거부할 때마다 군홧발에 몸과 마음이 짓밟혔다. 마침내 그녀는 정신 줄을 놓아버렸다. 망각의 힘을 빌려 위안소 생활과 폭력의 시간을 견뎌냈다. 어떻게 조국으로 살아 돌아왔는지 기억이 없다. 20년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절에서 지내던 중 다행히 여동생을 만났다. 동생은 언니를 돌봤고, 동생의 집에 살며 그녀는 조금씩 정신을 되찾았다.

분노와 증오로 얼굴이 벌게져 피해 사실을 말하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증언을 마치면서 미소를 짓고 안도의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함께 눈물을 흘려주는 사람들,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미안합니다’ 하고 말해주는 사람들을 만날 때다.

심달연 할머니에게도 1990년대 중반부터 그런 인연이 생겼다. 그녀에게 ‘딸’이 생겼다. 부추전을 부쳐놓고 먹으러 오라고 전화할 식구가 생겼다. 문소리만 나도 집안 구석에 숨고, 어쩌다 밖에 나가도 고개를 숙이던 그녀가 딸과 함께 ‘(사)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시민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하기 시작했다. 회원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면서 두려움이 없어지고 밝아졌다. 주위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라예’가 입버릇이던 심 할머니가 ‘사람다워졌다’고 했다. 심 할머니는 위안소로 끌려가는 배 위에서 당한 성폭력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그가 딸에게 ‘어린 나이에 강제로 그런 일을 당하면 누구나 돌게 되어 있어’라며 지워버린 기억들을 살려냈다. 살기 위해 지워버린 기억들과 마주할 정도로 자존감을 되찾았다.

ⓒ㈔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심달연 할머니의 압화 작품 〈전쟁, 없어져야 한다〉와 〈친구가 있어서 나는 외롭지 않아요〉(맨 위부터).
꽃을 사랑한 심달연 할머니는 2005년부터 꽃누르미(압화) 작업에 정성을 쏟았다. 처음에는 열쇠고리나 초 같은 소품을 만들었다. 2007년 그녀가 난생처음 연필을 잡고 자신의 이름과 소중한 이들의 이름을 꾹꾹 ‘그렸다’. 그리고 ‘친구가 있어서 나는 외롭지 않아요’라고 쓴 작품을 만들었다. 나비와 새가 꽃을 찾아와 어울리는 작품이다. 꽃은 심달연 자신이고, 나비는 조카 손자이고 친구들이다. 압화 작품 판매로 난생처음 돈을 번 심 할머니는 담배 한 보루를 사서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해했다. 스스로 똑똑해졌다고 뿌듯해했다. 정서 치료 일환으로 시작한 압화로 오로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진 그녀는 작가가 되었다. 심달연 할머니의 압화 작품 ‘전쟁, 없어져야 한다’와 ‘폭탄’은 형형색색 꽃잎들로 수놓여 있다. 그녀가 되살린 전쟁은 마치 폭탄이 터지듯 만발한 꽃잎이다.

권윤덕 작가는 그림책을 완성한 뒤에도 한국과 일본 어린이를 대상으로 수차례 모니터링을 진행했다. 도신샤가 출판을 포기한 뒤에도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읽고 또 읽고 일본을 오가며 궁리를 거듭한 끝에 2015년 한국에서 개정판을 냈다.

‘위안부 그림책’ 출판에 경비 보탠 일본인들  

그림책 작가 권윤덕과 압화 작가 심달연의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꽃으로 표상된 전쟁과 폭력이 그것이다. 권 작가는 자신이 읽어낸 ‘위안부’ 피해자들의 수많은 증언만큼 성폭력을 행한 일본 제국과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 및 증오를 끔찍하고 징그러운 형상을 한 스케치로 쌓아갔다. 그리고 그 징그럽고 끔찍한 것들을 모두 터뜨려 죽여서 복수하는 그림을 그릴 작정이었다. 권 작가의 이런 심정은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접한 이라면 누구라도 겪는다. 하지만 권 작가는 자기의 분노와 증오를 중립화해낸다.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표현을 들어내고 전쟁에서 거듭된 성폭력의 표상으로 베트남과 이라크 여성도 등장시킨다. 그리고 폭력을 휘두르는 가해자의 얼굴을 텅 비워 독자의 상상력에 맡기고, 전쟁과 폭력을 꽃으로 바꾼다. 핏발 서고 격렬한 분노와 증오가 아니라 따뜻하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독자의 마음을 파고든다. 심달연, 권윤덕 두 작가는 폭력을 그리지 않고도 폭력을 말한다.

2017년 10월 필자는 출판사 고로컬러의 기세 다카요시 대표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권윤덕 작가의 〈꽃 할머니〉를 출판하고 싶다고 했다. 필자는 기세 대표에게 우경화된 정치가 생활은 물론 시민의 권리와 표현의 자유까지 위협하는 일본에서 〈꽃 할머니〉를 출판하겠느냐며 각오를 물었다. 그는 자기가 엮은 책, 도쿄 조선중고급학교 축구팀의 반세기를 그린 〈무관, 그래도 최강(無冠、されど至強)〉을 내밀며 우익들의 공격을 두려워하면 일본에서는 어떤 창작도 출판도 불가능하다며 웃었다. 기세 대표는 〈꽃 할머니〉는 역사 교과서가 아니라며, 〈꽃 할머니〉의 상상력은 어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일본어판 〈꽃 할머니〉 출판에 필요한 경비 일부를 시민 202명이 보탰다. 고로컬러가 시작한 크라우드 펀딩은 4일 만에 목표액을 달성했다. 2차 모금까지 188만 엔(약 1800만원)이 모였고,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지난 4월27일 서점에 선보였다. 권윤덕 작가는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과 자신의 그림책이 일본 사회에서 존중받은 것 같다며 기뻐했다. 그림책 제작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고 싶은 것〉(감독 권효, 2013)의 일본어판 DVD도 책과 함께 발매되었다.

5월23일~7월28일 대구의 시민모임 부설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에서 기획 전시 〈그리는 마음〉이 열린다. 권윤덕 작가와의 만남은 물론 압화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다. 〈꽃 할머니〉 일본어판 출판과 일본판 DVD 발매를 계기로 일본과 한국의 많은 독자들이 심달연 할머니가 남긴 기억과 작품, 권윤덕 작가가 엮은 글과 그림을 찾아주면 좋겠다.

기자명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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