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전반에 걸쳐 생각하게 되는 기억들이 있다. 수학 선생이던 그는 학원에서 가장 다정한 사람이었다. 선생님께 나는 애제자였다. 학원비를 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돈을 대신 내주었고 다른 학생들 몰래 문제집 여러 권을 챙겨주며 나를 독려했다. 그는 그때 내가 손을 내밀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새로 차린 학원으로 나를 불렀다. “학원비 걱정은 하지 말고 여기서 마음껏 공부해.” 학원 독서실에 혼자 남아 공부하고 있으면 그는 티타임을 갖자며 똑똑 문을 두드리곤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티타임이 길어졌다. 그는 나를 붙잡고 다양한 이야기를 했는데 때로는 울기도 했다. 자신이 너무 외로우며 아내와의 관계도 힘들고 삶의 모든 것에 회의가 든다고 했다. 대화의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수능 끝나면 같이 가평에 놀러 가지 않을래?” “너에게만 털어놓자면, 요새 나는 퇴폐적인 생각이 자꾸 든다. 성매매나, 카섹스 같은 것 말이지.”

그런 대화가 갈수록 부담스럽고 힘들었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오랜 시간 그가 나를 보살펴주었는데 이런 일로 관계를 끊는 것이 맞을까. 무엇보다 그가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꽤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같은 반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말하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 날 학원을 가지 않았고 선생님과도 연락을 끊었다.

ⓒ정켈 그림

한동안 죄책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인간적인 유대가 분명히 있었는데 그것을 내가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할 때면 그 죄책감이 더 커졌다. 미성년자 성폭력 사건이라는 서사 속에서 나는 전형적인 피해자로, 또 그는 전형적인 가해자로 설정되었다. 그것은 나를 늘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건 너무 단순했다.

나는 내 머릿속에 있던 성폭력 가해자의 모습과 그를 도저히 병치시킬 수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상상한 성폭력 가해자는 괴물이고 악마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어떤 면에서는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몇 년간 이어진 관계에서 그가 내게 보였던 호의와 친절은 후에 있을 성폭력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한 인간의 내면에 선한 것과 악한 것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어쩌면 선악이 모두 진짜임을 받아들이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평범한 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선악

무엇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그 외에 다른 모든 이야기를 침묵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성폭력을 고백할 때마다 나의 목소리로 또 다른 목소리를 지우는 것은 아닌지 늘 두렵다. 어쩌면 피해자는 가해자보다 침묵을 요구당한 역사가 더 길기에 말하는 이의 선점 권력을 더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일 테다. 안 그래도 피해자의 경험은 의심의 대상이 되는데, 나 자신까지 스스로를 검열해야 하는가? 어째서 더 상처받고 더 성찰하는 사람은 남겨진 사람들일까. 언젠가 친구가 내게 말했듯, 우리가 페미니즘을 신뢰하는 것은 그것이 회의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가진 권력을 돌이켜보게 한다.

몇 문장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야기들, 이런 것은 사실 인기가 없다. 사람들은 성폭력 가해자가 자신과 질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가 괴물이고 악마이기를 원한다. 그래야 자신에 대해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학 선생은 내 주위 사람들, 딱 그 정도로 선하고 악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가해자의 관점에서 그를 이해하고 옹호하자는 이야기가 아님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오히려 그의 행동이 이해할 법하더라도, 그의 다른 면모가 훌륭하더라도 그것과는 무관하게 그가 저지른 성폭력에 대한 처벌이 어떤 양보도 없이 이루어져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자명 김민아 (페미당당 연구활동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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