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지혜를 구합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한 언론인이 자신이 취재하여 쓰게 될 글이 많은 이들의 마음에 가닿길 소망하며, 이 세계에 없는 존재에게 지혜를 간청하는 모습을 보면서 ‘좋아요’를 누르는 대신에 나 역시 기도했다. 지혜를 얻게 하소서. 그이가 내 친구여서가 아니라 내가 그이의 글을 애독하는 사람이어서였다.

어떤 존재에게, 무엇인가로부터 지혜를 얻고자 하며 간곡한 마음을 먹어본 지가 오래되었다. 지혜로운 노인이 되는 걸 장래 희망의 하나로 삼고, 늙으면 자연히 지혜로워진다는 말을 믿어본 적이 없는 나인데도 그리되었다. 책장을 넘기며 밤부터 새벽까지 지혜의 조개껍데기를 줍는 일은 이제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되었다. 당신은 지혜를 구하는 삶을 애써 살고 있는가. 가정 생활의 지혜나 회사 생활의 지혜를 깨알같이 적어놓은 글을 볼 때마다 궁금했다. 옷에 볼펜 자국이 났을 때 물파스를 발라두면 얼룩이 말끔히 사라진다거나 회식 자리에선 무조건 ‘무조건’을 부르며 당신이라는 가사 대신 부장님을 넣으라는 팁을 먼저 익히고 알린 지혜의 전파자는 어떤 사람일까. 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주고자 하는 자가 된다는 건 어째서 나타나는 인간의 본성일까. 지혜롭기 위해 평생을 책 속에 파묻혀 살다 눈이 먼 작가는 과연 소망한 대로 ‘지혜의 보고’가 된 것일까.

ⓒ시사IN 윤무영한 언론인이 자신이 취재하여 쓰게 될 글이 많은 이들의 마음에 가닿길 소망하며, ‘지혜를 구합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사람은 저마다 선호하는 지혜의 원산지를 갖고 있다. 어떤 이는 사람에게서, 어떤 이는 책에서, 어떤 이는 현장에서 지혜를 구하여 얻는다. 그뿐인가. 돈(자본)에서 지혜를 구하는 자도 있고, 멀쩡한 두 다리에서 구하는 자도 있으며, 남자라는 이유로 선천적으로 지혜로운 자도, 나이가 많다는 것으로 한사코 지혜로운 자도 있다.

자본의 내쫓음에 항거하며 밑바닥에서 정신을 잃은 이에게 “쇼를 하네, 쇼를 해”라고 말하는 건물주, 자신의 이동에 불편을 주었다는 이유로 “병신들 지랄을 하네”라고 말하는 비신체장애인, 말끝마다 “여자들이 모르는 게 있어”라고 말하는 유식한 남성, 청소년들의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나이도 어린 것들이 벌써 돈을 밝히느냐”라는 말로 박탈하는 어르신을 우리는 지금도 똑똑히 보고 있다. 태초에 지혜라는 말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줄 아는 힘을 이르는 단순하고 정확한 말이 아니었을까. 얻고자 하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지혜의 참다운 속성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 자연스레 지혜의 물꼬를 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자음과 모음이 닳아 없어진 키보드

지혜에 순응하며 부단히 지혜를 갱신하고 싶어 하는 이의 눈빛은 어떻게 생겼을까. 작가이자 가사노동자이고 두 아이의 엄마이며 한 사람의 파트너인 내 또 다른 친구는 자음과 모음 두 개가 닳아 없어진 키보드 사진을 SNS에 올리며 그 순응과 도전의 소회를 짤막한 글로 적었다. 발로 뛰고 머리와 가슴으로 앓고 손끝에 힘을 주는 가운데 친구는 자신이 허투루 알고 있던 거짓 지혜를 폐기하고 새로운 지혜를 구하고 얻었을 것이 분명하다. 한 사람이 진실로 지혜를 얻고자 했던 역사를 ‘ㅇ’ ‘ㅡ’ ‘ㄴ’ ‘ㅜ’로 유추해보면서 나 자신도 되묻게 되었다. 나의 지혜는 어떤 자음과 모음이 닳고 해지면서 생겨난 결과물이어야 할까. 다시 지혜를 구하여 얻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문득, 언론인으로서 자신이 쓰는 글이 ‘우리의 간격을 좁히고 이해를 돕는 데 쓰일 수 있을까요’라며 하나님에게 지혜를 구하려고 한다는 친구의 키보드가 궁금해졌다. 친구의 하나님은 아마도 그 자신이 쓰고 있는 키보드가 아닐까. 당신의 지혜는 당신의 어디에 깃들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오늘은 나를 둘러싼 사람, 사물, 현장, 말, 글을 찬찬히 살펴볼 일이다. 아직 우리의 두 눈이 총총히 빛나고 있을 때.

기자명 김현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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