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클베리핀 이기용이 만난 뮤지션-12 허클베리피

“그곳은 꿈꾸는 모두를 집어삼키는 무덤/ 하루에도 몇 구씩 발견되는 싸늘한 주검/ 하늘 아래 가장 높게 솟은 새하얀 구멍/ 꼭대기에 대한 상상은 내겐 오래된 즐거움”(허클베리피 ‘에베레스트’ 가사 중).

2016년에 발표된 〈점〉 앨범에 수록된 ‘에베레스트’라는 곡은 인생을 높은 산에 오르는 것으로 비유한 곡이다. 이 곡의 가사는 근래 보기 드물게 높은 문학성으로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프리스타일 랩(즉흥으로 라임을 만들어가며 하는 랩)의 실력자로 데뷔 초기 힙합 신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지금 가장 드라마틱한 랩을 쓰는 뮤지션이자 국내 최고의 라이브 강자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았다. 그가 매해 연말에 여는 단독 공연 〈분신〉은 관객의 뜨거운 반응 속에 1분 안에 전석이 매진된다.

힙합 경연 TV 프로그램 〈쇼미더머니〉는 어느새 수많은 힙합 스타들을 양산하며 그들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허클베리피는 ‘모두가 획일화된 방식으로 성공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게 나의 즐거움이고 목표’라며 경연 참여를 거부해왔다.


 

ⓒ허클베리피 제공허클베리피(위)가 매해 연말에 여는 단독 공연 〈분신〉은 관객의 뜨거운 반응 속에 금세 전석이 매진된다.


이기용:록 음악 하는 허클베리핀이 랩 하는 허클베리피에게 인터뷰 제의를 했는데?

허클베리피:좀 놀랐다. 나는 처음에 작업 제의인 줄 알았다(웃음). 허클베리피라는 이름을 지을 때부터 꼭 만나보고 싶었다.

이기용:허클베리피 음악을 듣다 보니, 힙합 하면 어떤 특정 이미지만을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점〉 앨범을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특히 ‘에베레스트’라는 곡이 그렇다.

허클베리피:‘에베레스트’는 단순히 나라는 사람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성공이라는 바늘구멍에 들어가야 하는 모두한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지금 힙합은 대세 음악이 되었고, 〈쇼미더머니〉같이 래퍼가 성공할 수 있는 큰길도 있다. 그래서 거기를 통하지 않고 독자적 노선을 취하는 것이 굉장히 외롭게 느껴지고 내가 지금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 싶을 때가 있었다. 마치 홀로 에베레스트를 올라가는 것 같았다. 내가 과연 꼭대기를 볼 수 있을까. 당시 〈쇼미더머니〉 등으로 잘되는 누군가의 모습을 봤을 때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해 자신이 초라해지고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생각’이 내가 메고 있는 짐보다 실제로 더 삶을 무겁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쓴 가사다. 예전에는 꿈이 삶보다 중요했지만 지금은 삶이 꿈보다 더 크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기용:당시 음악을 하면서 겪어보지 않았던 슬럼프를 겪었다고 했다. 슬럼프에 빠지게 된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허클베리피:다른 건 없다. 〈쇼미더머니〉가 슬럼프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공연장에서는 내가 훨씬 더 큰 호응을 얻고는 했는데, 제 옆에서 같이 랩을 하던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서 하루아침에 갑자기 인생이 바뀌는 걸 보니 나도 인간인지라 갈등이 있었다. 나도 〈쇼미더머니〉에 나가야 하나, 그러면 당장 내가 더 유명해지고 내 주변 사람들의 삶이 윤택해질 텐데 하는 생각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정신적인 가치와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함께 드니까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창작이 안 되더라. 그래서 엄청나게 힘들었다. 한 번도 겪지 않았던 음악적인 슬럼프가 왔다.

이기용:어떻게 극복했나?

허클베리피:너무 힘든 중에 자연스럽게 친구들이 어떤 식으로 살고 있는지가 눈에 좀 들어왔던 것 같다. 누가 봐도 교사가 천직일 것 같았지만 임용고시에 연이어 낙방하다 바리스타가 된 친구가 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어느 날 내게 정말 맛이 좋은 에스프레소를 만들어주었다. 지금 이 친구가 만들어준 이 커피가 너무나 맛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 ‘아, 결국 이거구나. 삶에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 요소들이 중요한데, 그게 내게는 랩이었다면 오케이. 그걸로 행복하다. 나라는 사람이 아름답지 않거나 실패한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생각을 하면서 〈점〉 앨범을 만들게 됐다. 어떤 거대한 생각의 전환이 있었던 거다.

이기용:국내 프리스타일 랩의 일인자에서 어느덧 ‘에베레스트’와 같은 높은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랩도 쓰고 있다. 힙합 랩의 어떤 면에 사로잡히게 됐나?

허클베리피:힙합을 좋아하는 첫 번째 이유는 교육도 미디어도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을 때, 유일하게 힙합과 음악이 ‘내가 내 자신이 되어도 행복할 수 있어’라고 말해줬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랩이 가진 무궁무진한 잠재력 때문이다. 랩은 그 가사 안에 어떤 주제를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서 공감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노래 가사가 추상적이고 함축의 미학을 가지고 있는 반면, 랩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매우 ‘디테일하게’ 이야기하는 게 가능하다.

이기용:가사에서 다음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음악으로 이렇게 말하는 뮤지션은 드물다. 무슨 뜻인가?

허클베리피:시종일관 획일화되고 전형적인 것에 대해 숨 막히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런 것에 반대하는 가사를 노래 구석구석에 마음을 담아 써놓았기 때문에, 내가 뿌려놓은 씨앗이 언젠가는 이 콘크리트에 균열을 내서 다음 세대가 되면 좀 더 나아질 거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이기용:앞으로 그런 신념을 지닌 채 계속 나아가려면 강력한 내면의 힘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허클베리피:그래서 그렇게 획일화된 성공을 강요하고 그것에 반대하면 패배자 취급하는 태도에 잡아먹히지 않으려 노력한다. 특히 주위의 열린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하려고 한다. 나의 생각을 재정립시키고 다시 무너뜨렸다가 다시 단단하게 해주는 그런 것이 대화가 주는 장점이다. 중·고등학교 때, CD 사서 비닐 벗기고 플레이어에 넣고 딱 귀에 꽂는 순간 온 우주가 고요해지면서 그 뮤지션이랑 나랑 단둘이 대화하는 느낌을 받았다. 뮤지션이 던지는 메시지에 내 마음이 반응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게 바로 대화가 아닐까. 그런 대화를 할 사람이 없는 이들을 위해서 바로 예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허클베리핀의 모험〉에서 주인공 허클베리핀은 짐이라는 흑인 친구와 모험을 한다. 그러다 짐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고발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흑인은 자유로우면 안 되는 시대였고 그를 고발하면 경제적으로 이익을 얻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허클베리핀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대신 ‘우린 동고동락해왔고 수많은 역경을 같이 넘어왔어. 나는 짐과 함께할 거야. 만약 내가 짐을 고발하지 않아서 지옥에 가야 한다면, 그래 그 지옥은 내가 가겠어’라고 얘기한다. 허클베리피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소설의 결정적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소설 속 허클베리핀과 래퍼 허클베리피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그의 인간적인 갈등에 공감하고 그 신념을 지지한다. 그래서 그가 들려줄 다음 음악이 무척 기다려진다.

 

기자명 이기용 (밴드 허클베리핀 리더)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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