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상을 해보자. 어느 날 갑자기 휴전선이 열린다면? 그래서 남북을 자유롭게 오가게 된다면? ‘에이, 말도 안 돼’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북 정상회담과 북한 핵 폐기, 북·미 정상회담처럼 ‘이거 실화냐?’ 싶은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지 않나. 우리와 비슷한 처지였던 독일을 보자. 독일은 나라가 동서로 갈려 있었다. 심지어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도시를 동서로 가르는 ‘베를린 장벽’을 올렸다. 베를린 장벽은 냉전 시대와 분단국가의 강력한 상징이었다.

〈어쨌거나 핑퐁〉은 바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의 이야기를 만화로 옮겼다. 주인공 미르코 바츠케는 동베를린에 사는 7학년 학생으로 우리로 치면 중학교 저학년쯤 된다. 미르코는 모범생이지만 할 줄 아는 운동도 없고, 껄렁한 고학년들에게 찍혀 맘을 졸이는 소심한 아이다.

〈어쨌거나 핑퐁〉 마빌 지음, 윤혜정 옮김, 돌베개 펴냄

그런 미르코가 탁구를 치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돌로 된 탁구대에서, 탁구채도 없이 교과서로 탁구를 친다. 그나마도 탁구대가 모자라 여러 명이 탁구대를 빙글빙글 돌아가며 친다. 그래도 탁구는 재밌기만 하다. 미르코는 삐딱한 전학생 토르스텐과도 친해진다. 토르스텐은 ‘서독’ 아빠를 둔 센 척하는 말썽쟁이로, 유일하게 소년단에도 들지 않았다.

점점 탁구에 불이 붙은 두 사람은 급기야 소년단 창립기념일에 탁구 친선 경기를 기획한다. 대회에는 전교생의 절반이나 참가를 신청했다. 그런데 기다리던 경기 날, 미르코는 그만 외출 금지를 당한다. 모범생 미르코도 이번만은 부모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의지에 따라 어렵게 마련한 대회에 참석하기로 결심한다.

하필 그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다니

아,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미르코를 배신하고 말았다. 그날, 거짓말처럼 베를린 장벽이 열린 것이다! 냉전? 분단? 역사? 그런 건 모르겠다. 베를린 장벽보다 미르코와 토르스텐에게는 친구와 힘을 모아 준비한 탁구대회가 훨씬 중요하다. 친구와의 약속이 훨씬 중요하다. 그런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두 아이의 우정은 가장 큰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어른들 멋대로 장벽을 세우더니, 이제는 벽을 부수고 자기들끼리 신이 났다. 미르코의 부모는 싫다는 미르코를 억지로 끌고 서베를린으로 향하고, 토르스텐의 엄마는 친구와 자축 파티를 벌인다. 아이에게 관심 가져주는 어른이 없는 세상 속에서 성장하는 미르코의 모습이야말로 〈어쨌거나 핑퐁〉이 주는 진짜 감동이다.

〈어쨌거나 핑퐁〉에는 분단의 비극과 통일의 억지 감동을 강요하는 일 따위는 없다. 정치적이고 무거워질 수 있는 소재를, 아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성장 속에 ‘배경’으로만 활용한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러면서도 공산주의 국가의 모순된 면모를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인 솜씨가 대단하다. 인물의 개성을 과장하면서도 따듯하고 귀여운 그림체가 돋보인다. 모두가 떠나버린 비 내리는 교정에서 미르코와 토르스텐이 껄렁한 선배들과 겁도 없이 복식탁구 대결을 벌이는 장면은 어찌나 비장하면서도 코믹한지!

 

기자명 박성표 (〈월간 그래픽노블〉 전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