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키나와 포로수용소 수감자 명부에 적힌 한자 세 글자가 선명하다. ‘鄭載植(정재식).’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군 측 문서에 직접 서명한 저 이름은, 아버지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흔적이다.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는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다. 아들은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며 가끔 아버지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다 보면 짧은 아버지의 삶과 그가 남긴 기구한 가족사도 떠오른다.

일본 땅에서 미군의 포로가 된 스물세 살 조선 청년 정재식은 1946년 조국으로 돌아왔다. 일본의 ‘처녀 공출’을 피해 열다섯 살에 자신과 결혼한 아내 이외식이 고향 경북 칠곡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어린 아들 정병곤도 아버지를 기다렸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충북 영동군의 한 요양원에 머물고 있는 이외식씨(왼쪽). 그의 남편은 재판도 없이 총살당했다.

해방 정국의 조국은 좌익-우익 대결이 치열했다. 적군과 아군이 불분명하고 전선도 없는 전쟁.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다시 기용하고, 강압적으로 식량을 공출하자 이에 항의하는 대구·경북 사람들이 많았다. 시위가 이어졌다. 미군정은 1946년 10월2일 계엄령을 선포해 진압에 나섰다. ‘대구 10월 사건’ 과정에서 수십명이 사망하고 7500여 명이 체포돼 수사를 받았다.

정재식은 1948년 둘째 아들 정도곤을 낳았다. ‘빨갱이 사냥’이 대개 그렇듯 많은 사상자를 낸 대구 10월 사건의 여파는 오래갔다. 칠곡군 지천면 심천동에서 농사를 짓던 정재식은 1949년 5월 칠곡경찰서로 강제 연행됐다.

며칠 뒤, 경찰은 정재식을 칠곡 유학산 벼랑골에서 총살했다. 영장도, 재판도 없는 처형이었다. 이외식은 “빨갱이 아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혼자 두 아이를 키웠다. 첫째 아들 정병곤은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불발된 포탄을 갖고 놀다가 사망했다. 동네에선 이외식을 두고 “빨갱이 아내는 팔자가 사납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외식은 둘째 아들 정도곤(당시 11세)을 할아버지·할머니에게 맡기고 고향을 떠나 재가했다.

정도곤은 초등학교만 겨우 마친 뒤 먹여주고 재워주는 대구 빵집에서 일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부산으로 내려가 부두 노동자로 일하며 살았다. 결혼해 1녀3남을 낳았다. 많이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게 없는 정도곤에게 사는 건 전쟁이었다. 자신이 첫돌을 맞았을 때 사망한 아버지를 생각하는 건 사치였다. 어렸을 때 떠난 어머니를 오래 미워하고, 긴 세월 그리워했다. 정도곤도 어느새 환갑을 맞았다.

2010년 3월30일,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소식이 멀리 서울에서 들려왔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는 ‘대구 10월 사건’ 진실 규명을 결정했다. 과거사위가 낸 보고서에는 아버지 이름이 나온다. “칠곡군 지천면 심천동의 정재식 등은 1949년 6월 초순 칠곡군 성곡리 벼랑골에서 다른 면의 주민 수십명과 함께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내용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 사건의 일차적 책임은 법적 절차 없이 민간인을 임의로 살해한 현지의 경찰에게 있으므로, 대구 10월 사건 관련 민간인 희생자 및 그 유족들에게 위령 추모사업 지원,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역사 기록 수정 및 등재, 평화인권 교육 강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

정도곤은 이를 근거로 2011년 4월7일 부산지방법원에 국가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했다. 아버지 정재식이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자기 삶이 이토록 힘들지 않았을 거라며, 돈으로라도 지난 삶을 위로해달라고 국가에 요구했다.
 

ⓒ연합뉴스2017년 12월29일 김용덕(오른쪽)·박보영 대법관이 퇴임식을 마치고 대법원 청사를 나서고 있다.

정도곤을 대리한 변영철 변호사는 “아버지 정재식 사망 당시 어머니 이외식은 정식 혼인 관계였으니, 그분도 손해배상금을 받아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정도곤은 약 50년 만에 어머니를 수소문했다. 이외식은 아들보다 1년 늦은 2012년 5월24일 똑같이 부산지방법원에 국가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같은 사건을 다루는 소송이므로 이외식·정도곤의 재판은 동시에 진행됐다. 재판부도 동일했다. 국가는 “정재식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1949년 이후 5년이 훨씬 지났으니 손해배상을 해줄 수 없다”라는 이른바 소멸시효 항변을 주장했다. 1심 법원은 이런 국가의 주장을 배척했다.

부산지방법원은 2013년 1월16일 “국가는 정재식의 아내 이외식에게 약 3억3000만원, 아들 정도곤에게 약 2억6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국가는 돈을 줄 수 없다며 항소했다. 부산고등법원에서 2심 재판이 시작됐다. 역시 동일한 사건이므로 같은 재판부가 맡았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자 사법부는 과거사 사건을 이전과 다르게 판단하기 시작했다. 이외식·정도곤 사건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산고등법원은 국가 폭력으로 정재식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손해배상금은 대폭 삭감했다. 정재식 사망 당시 정확한 수입을 산정하기 어렵고, 배상금 지연이자는 1심 변론 종결일(2012년 12월12일)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다.

부산고등법원은 “국가는 이외식에게 약 8800만원, 정도곤에게 약 5000만원을 지급하라”고 2014년 1월9일 판결했다. 이외식·정도곤은 불복해 각각 대법원에 상고했다.

자기모순에 빠진 ‘양승태 대법원’의 판결

반전은 ‘양승태 대법원’에서 일어난다. 2014년 5월16일, 대법원 제2부(주심 김소영)는 어머니 이외식의 2심 판결을 그대로 인정했다. 그런데 1년5개월 뒤인 2015년 10월29일 아들 정도곤 판결이 뒤집혔다. 같은 사건인데도 대법원 제3부(주심 김용덕)는 국가는 정도곤에게 배상금을 단 한 푼도 줄 필요가 없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먼저 대법원 제3부는 “정재식 유가족이 직접 과거사위에 진실 규명 신청을 하지 않았고, 정재식은 과거사위 결정서가 아닌 ‘첨부자료’에만 이름이 등장한다”라며 유가족의 손해배상 청구 권리를 인정할 수 없다는 근거를 들었다.

그럴듯하지만, 양승태 대법원 스스로 자기모순에 빠진 판결이다. 과거사위 첨부자료에 정재식과 함께 피살자로 거론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대법원이 국가배상을 확정했기 때문이다.

또 대법원은 손해배상금을 청구할 권리의 시효가 이미 오래전에 완성됐다는 국가 측 주장도 받아들여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이는 더 황당한 논리다. 아들 정도곤은 어머니보다 1년4개월 일찍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어머니 이외식에겐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더니, 먼저 청구한 정도곤에겐 너무 늦게 신청해서 돈을 줄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양승태 대법원이 같은 사건을 두고 앞뒤가 안 맞는 논리를 내세운 셈이다. 대법관들도 사람이니 단순 실수로 같은 사건인 줄 몰랐던 걸까? 이런 ‘인간적 실수’ 방지와 빠른 판결을 위해 정도곤 변호인단은 어머니 ‘이외식의 대법원 판결문’을 대법원에 참고자료로 제출했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정반대 판결을 했다. 대법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 가능한 게 있다. 양승태 대법원의 법원행정처가 2015년 7월31일 작성한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 문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대법원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해왔다. 부당하거나 지나친 국가배상을 제한하고 그 요건을 정립했다.”

정도곤은 자신과 어머니의 지난 삶이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 거래’에 이용됐다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면 같은 사건을 두고 다른 판결을 내린 대법원을 이해할 길이 없다.

대법원 소부 판결은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한다. 의견 일치가 안 되면 대법관 전원합의체로 넘어간다. 어머니 이외식 판결을 맡은 당시 대법원 제2부는 이상훈(재판장), 신영철, 김용덕, 김소영(주심) 대법관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만장일치로 국가 배상을 결정했다. 1년5개월 뒤 아들 정도곤 판결을 맡은 당시 대법원 제3부는 김신(재판장), 김용덕(주심), 박보영, 권순일 대법관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만장일치로 국가 배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용덕 대법관(지난 1월 퇴임)은 두 재판에 모두 참여했다. 만장일치 원칙을 고려하면, 김용덕 대법관은 같은 사건을 두고 다른 판결을 한 셈이다.

정도곤은 “대법관으로서 형평에 어긋나고 신뢰를 저버리는 판결을 했다. 정의 관념에 비춰봐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라며 6월7일 김용덕 전 대법관을 상대로 약 2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오른쪽 기사 참조). 그는 “나와 어머니의 판결이 다른 이유에 대해 대법원이 납득할 만한 근거를 댔다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같은 죽음을 두고 원칙 없이 다른 판결을 하면 어느 시민이 이를 인정하고 가만히 있겠느냐”라고 반문했다.

정도곤의 아버지 정재식은 식민지 나라에서 태어나 강제징용되어 일본군 군속으로 전쟁에 나갔다. 해방 뒤에는 미군 포로가 됐다. 어렵게 살아 돌아온 그를 국가는 재판도 없이 “빨갱이”로 몰아 처형했다. 그의 첫째 아들은 한국전쟁으로 죽었다. 자기 이름 석 자 적은 필체만 남기고 사라진 사람.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 거래 의혹을 보면 해당 사건의 주인공들은 대개 이런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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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박상규 (진실탐사그룹 ‘셜록’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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