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예테보리 대학 예술학교에서 평등정책 관련 보고서 작업에 연구보조로 참여했다. 또 사회예술 과목 강의를 동료 예술가와 함께 맡아 진행했다. 수강생은 순수미술·사진·영화과 학부생들이었다. 신설 강좌인 데다 필자와 동료 둘 다 처음 스웨덴 대학생들 앞에 섰다. 강의 진행 내내 도전받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학기가 지난 후 돌이켜보면 호칭 때문에 가장 진땀을 흘린 듯하다. 수강생 중 한 명이 우리가 부르는 호칭에 대해 매번 지적하며 수정을 요구했다.

스웨덴어에는 삼인칭 대명사에 ‘그(Han·남성)’와 ‘그녀(Hon·여성)’가 있다. 대명사 그(Han)는 남성을 지칭하지만 보편적으로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런데 1960년대부터 무성인 대명사 ‘그(Hen·무성)’가 최근에 많이 쓰이고 있다. 그 학생은 우리가 그녀라 지칭할 때마다 매번 자신의 성정체성을 존중해달라며 그(Hen)로 불러달라고 했다. 필자는 그 단어(Hen)를 평소에 잘 사용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솔직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 학생을 지칭할 때면 한 번 더 생각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입에서 그녀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아이고, 미안…”이라며 실수를 깨닫고 수정했다.

ⓒ뉴고민정 제공예테보리 시가 발행한 HBTQ 자문위원회 소개 책자(왼쪽)와 계획안.


예술학교 강의 경험이 풍부하고 그 자신이 성소수자인 지도교수를 찾아가 어떻게 강의를 이끌어가야 할지 조언을 받기도 했다. 우리는 이 학생을 별도로 불러 감사의 말을 전했다. 같이 수업에 참여하던 다른 학생들에게도 솔직히 말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편견이 드러났다. 여러분에게 많이 배웠다. 이번 수업은 강사-학생 구분이 모호해졌다. 우리는 평생 실수하면서 배운다. 학생들에게 고맙다.”

해녀 전시를 예테보리 시립 해양박물관에서 진행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제550호 ‘북유럽 박물관에 제주 해녀 뜨다’ 기사 참조). 전시를 준비하며 박물관 직원들의 업무 환경을 관찰할 수  있었다. 전체 직원 대다수는 여성이었다. 직원들의 업무를 관찰하다 보니 ‘Norm Kritisk(노름 크리티스크)’라는 단어를 자주 접했다. 한국어로 풀이하면 규범 비판, 즉 보편적 가치(특히 가부장적인 가치)를 비판한다는 뜻이다. 업무 지침에서 다양성을 지지하고 포괄적인 평등을 위한 ‘노름 크리티스크’라는 단어를 자주 발견했다.

그런데 포괄적인 평등이 실현되는 ‘유토피아’가 존재할 수 있을까? 예테보리 시가 운영하는 박물관에서는 구체적으로 실현 중임을 관찰할 수 있었다. 기획 전시 내용만 보아도 그렇다. 스웨덴에서 볼 때 먼 이국의 여성 문화인 〈제주 해녀 문화전〉, 난민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바다를 건너〉전과 각종 소수 인권그룹 행사가 열렸다. 직원들은 이런 전시회나 행사 때마다 포괄적인 평등에 관한 재교육을 받는다. 한 나이 든 남자 직원은 “노름 크리티스크(규범 비판)가 업무 과정에서 매사 강조되다 보니 나도 적지 않게 지적을 받는다. 그럴 때면 ‘혹시 내가 남자라서 역차별을 받나’라는 느낌까지 들었다”라고 말했다.

노름 크리티스크 정착을 위해 공공기관인 박물관 측은 업무 과정에서 ‘예외’를 두지 않으려고 한다. 필자도 직접 겪었다. 〈제주 해녀 문화전〉 오프닝 때 6년간 해녀 작업을 한 김형선 사진작가가 가장 주목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가 남성 사진가라는 이유로 박물관 측에서 굳이 무대로 초대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필자와 다큐멘터리 〈물숨〉을 만든 고희영 여성 감독이 현장에서 즉석으로 김 작가를 무대에 초대하기도 했다.

 

 

 

ⓒEPA2017년 8월5일 스웨덴 스톡홀름 시민들이 ‘게이 프라이드 퍼레이드’에서 행진하고 있다.

 

예외 없는 적용 지침에는 이유가 있었다. 예테보리 시 의회는 2018년 예산안을 통과시키며 다음과 같은 문구를 넣어 시민의 세금이 어디에 쓰여야 하는지 명확히 했다. “평등하고 지속 가능한 도시는 모든 사람의 인권이 충족되는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예테보리에는 다양한 배경, 경험 및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도시를 활기차고 부유하게 하는 데 기여하지만, 한편 도전도 가져옵니다. 예테보리 시는 도시의 모든 주민, 특히 취약한 사람들을 돌볼 책임이 있습니다. 예테보리 시는 차별을 야기하는 모든 요소에 반대해 시민들이 평등한 대우를 받도록 체계적인 활동을 해야 합니다. 예테보리 시는 남녀평등의 모델입니다. 양성 평등의 관점은 예테보리 시의 결정, 통치 및 활동에 적용될 것입니다.”

특히 예테보리 시는 스웨덴에서 자체 HBTQ(성소수자) 자문위원회가 있는 첫 번째 도시이다. 8월 예테보리와 스웨덴 수도인 스톡홀름은 유럽 내 성소수자 축제인 ‘유로 프라이드 2018’ 행사를 공동 주최한다. 예테보리 시의 HBTQ 자문위원회는 가부장적 규범에서 비롯된 관점에서 벗어나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 방지와 인권 향상을 위해 여론을 형성하고 정책을 마련한다. 시의회 소속 의원 19명과 HBTQ 커뮤니티 대표 13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HBTQ 자문위원회 출범에 앞서 실태조사가 있었다. 2014년 조사 결과 HBTQ 커뮤니티에 속한 사람들의 생활환경이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훨씬 열악하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보고서는 22개 정책을 제안하고 예테보리 시는 비영리단체 지원, 차별 방지, 채용 등 5개 부문에 대한 정책을 수립했다. 예테보리 시와 산하 모든 공공기관은 HBTQ 시민이 동등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이 정책을 따르게 했다.

시가 마련한 구체적인 실행안을 살펴보면 HBTQ 시민의 폭력 노출 상황에 대한 연구 진행, 폭력을 당한 HBTQ 시민을 위한 특별주택 운영, HBTQ 시민을 대상으로 한 지원센터 설립, 성소수자들도 이용할 수 있는 스포츠 여가활동센터 건립 추진 등이 있다.

예테보리 시가 성소수자 위원회를 만든 까닭

무엇보다 예테보리 시 차원에서 HBTQ 전문 공무원 채용 및 공무원 재교육 정책도 추진했다. 주택공사나 난민센터 등에 HBTQ 전문가 직원 채용, 시에서 일하는 HBTQ 직원들의 업무환경 조사, 시청 소속 공무원뿐 아니라 산하 공공기관 직원들도 다양한 가치를 수용할 수 있도록 교육 이수 등을 추진했다. 시민 교육도 강화했다. 먼저 초등학교에서 다양한 가치를 수용하는 교육이 이루어지는지 조사했다. 시 차원에서 차별 방지 및 다양한 가치를 옹호하는 교육을 실행하는 비영리단체 등을 지원했다.

이런 진보적인 정책이 과연 제대로 추진되고 있을까? 성소수자를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RSFL로부터 시 산하 공공기관이 HBTQ 인증을 받고 있다. RSFL이 고안한 수개월짜리 교육 프로그램을 해당 직원들이 성공적으로 이수하면 인증을 해주는데, 그 과정이 까다롭다. 최소 한 그룹에 약 25명이 수강해야 하며 1인당 5000크로나(약 64만원), 즉 25명이면 12만5000크로나가 드는 교육이다. 시 산하 청소년센터, 의료기관, 도서관, 교육기관 등이 인증을 받았다.

예테보리 시의 공공기관들은 직원들을 대상으로 HBTQ 전문 교육을 이수하게 한다. 하지만 차별 인식과 평등, 다양한 가치 공존 문제는 쉽지 않다. 단적인 예를 들면 시 전체 인구 25% 이상이 다문화 가정 배경을 가졌는데, 시의 대표적 문화기관인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비(非)스웨덴 성을 가진 직원이나 백인이 아닌 직원은 거의 없다.

 

기자명 예테보리·고민정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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