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을 듣고 미처 황망할 틈도 없이 선생님을 모신 장례식장에 들어서는데 추모 화환을 배달하는 이가 다가오기에 승강기 문을 잡아주었다. “최인훈 선생님께 가시나요?” 했더니 “조금 전에는 노회찬 의원 영안실에 꽃 배달을 다녀왔다”라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한다.

선생님의 연세가 올해로 84세였고, 말기암 판정으로 누워 계시는 동안 병문안도 다녀왔기에 언제 떠나신들 담담하게 보내드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상주가 된 친구와 애통해하는 사모님, 나를 ‘오빠, 오빠’ 하며 따르던 따님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상복 차림으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모든 것이 일순간 현실로 다가왔다. 애통한 마음은 숨길 수 없지만 영전에 혹여 누가 될까 두려워 이 글을 쓰는 것을 몇 번이나 거절했으나 피할 수 없게 된 내 마음으로 축축한 물기가 스며든다. 여전히 믿을 수 없는 현실이다.

ⓒ연합뉴스최인훈 작가(위)의 〈광장〉은 국내 문인들이 뽑은 최고의 소설로 선정되었다.
잠시 고등학생 운동권에 몸담았던 여파로 공장과 막노동판 떠돌기를 3년,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 싶어서 선택한 대학이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소설가를 꿈꾸었으니, 선생님의 소설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독서 목록 중 하나였다. 최인훈 선생이 계신 대학에서 당신에게 소설을 공부할 수 있다는 삶의 목적이 생겼고, 불행 중 다행으로 그해 후기대 시험지 도난 사건이 일어나 시험이 연기되면서 나는 극적으로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선생의 아들과 친구가 되었고, 갈현동 댁에 종종 놀러 갈 수 있었다. 제자이자 아들 친구라는 연(緣)이 겹친 덕분에 결혼식 주례를 서주시기도 했다.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사회에 나와 잡지 편집장을 하면서 틈틈이 선생님의 작품을 다시 읽고, 대학에서 학생들과 그의 작품을 토론할 때마다 감탄을 넘어 경외(敬畏)하는 마음마저 품게 되었다. 그것은 한문이나 일본어가 아닌 한글을 통해 사유하고, 문학하는 역사가 매우 짧았던 우리 문학사에서 다시 한번 이와 같은 거장이 출현하려면 얼마나 먼 길을 가고, 얼마나 많은 실험장을 거쳐야만 가능할지 까마득했기 때문이다. 이제 고백하지만, 대학 시절에는 너무 어렸기에 나는 선생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감히 단언컨대 지금도 나를 비롯해 우리 사회는 작가 최인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작가로서 선생님은 생전에 이미 다른 이들은 누릴 수 없는 명예와 위상을 누렸다. 〈광장〉은 국내 문인들이 뽑은 최고의 소설로 선정되었고, 가장 많은 종의 문학 교과서에 수록되었으며, 전후 최고의 작가라는 평가는 앞으로 몇 세기가 흐르더라도 확고할 것이다. 그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폭과 깊이를 제대로 헤아리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세간의 오해 중 하나는 선생을 안티리얼리스트, 실존주의자, 관념주의라거나 자유주의, 개인주의자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 〈광장〉을 읽고 걸작으로 손꼽으면서도, 이 작품의 제목이 어째서 ‘밀실과 광장’이나 ‘광장과 밀실’이 아닌 ‘광장’인지 따져 묻지 않았다.

ⓒ연합뉴스7월23일 최인훈 작가의 빈소 앞에 놓인 작가의 주요 작품들.
잘 알려진 대로 작가 최인훈은 일제 치하 함북 회령에서 출생해 한국전쟁 기간에 LST(상륙함) 편으로 월남한 피란민이었으며, 분단과 독재는 그의 생애 대부분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였다. 생애 동안 노출된 발언들은 일부 시평이나 비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문학적 발언에 국한된 것이었으나 그가 작품 속에서 말해온 것들은 결코 먼 나라의 추상적 관념이 아니었다. 분단과 전쟁 그리고 독재를 비롯해 인간을 갈아 넣어야만 돌아가는 세계자본주의 체제를 살아가는 한반도의 민중이 삶을 통해 맞닥뜨린 현실이었다.

그는 역사의 극단적 전개 과정에서 소박한 휴머니즘적 대안에 안주하는 대신 민족국가의 경계를 넘나들며 치열하게 성찰하며 분투한 작가였다. 〈광장〉의 서문에 등장하는 “저 빛나는 사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이란 구절은 그가 어떤 지향을 가진 사람인지 잘 보여준다.

〈광장〉의 이명준과 〈회색인〉의 독고준

작가 최인훈은 최근 통일의 구체적 방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중립화 통일론에 대해 이미 〈총독의 소리〉에서 오스트리아식 중립화 통일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한 바 있다. 〈태풍〉에서는 서구 근대의 식민제국 질서를 극복하고, 냉전 질서의 외부를 상상하는 아시아 비동맹 연대와 아시아적 가치의 모색을 실험한 바 있다. 〈광장〉의 이명준과 더불어 최인훈 문학을 상징하는 〈회색인〉의 독고준은 서구를 통해 이식된 근대적 개인이란 자아를 성찰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문학을 통해 고민했던 탈근대와 탈냉전, 민족국가의 경계와 자본주의 체제의 외부를 상상하는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 커다란 화두로 남았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나는 선생님께 직접 소설을 배울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하필 그 무렵 〈화두〉를 집필하기 위해 안식년을 갖고 1년간 집필에만 몰두하셨기 때문이다. 나중에 댁에서 〈화두〉 한 질을 선물로 받으며 서운한 마음을 달래기도 했지만, 선생은 잡지 편집자인 제자에게 큰 선물을 주셨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생전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 〈바다의 편지〉를 2003년 〈황해문화〉 창간 10주년 기념호(통권 41호)에 수록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다. 선생이 이 작품에 들인 애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2012년에 펴낸 산문집 제목 역시 ‘바다의 편지’였다는 사실로 가늠해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광장〉의 결말을 두고 오갔던 비판에 대한 그의 문학적 답변이기도 했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바다로 뛰어내린 이명준의 선택을 두고 왜 자살했느냐 도피가 아니냐 하는 지적도 있지만, 현실에서의 도피와 작품 속 도피는 다른 것입니다. 이명준은 죽은 다음에도 최일선에서 바다 밑 보초를 서고 있는 셈이죠. 백골이 되어서도, 죽은 후에도 조국을 사랑하고 철학을 사랑하고 있달까요”라고 말했다. 선생의 문학적 유서가 되어버린 〈바다의 편지〉 마지막 문장에서는 “어머니, 들리지 않으시지요. 그래서 마음 놓고 부릅니다. 어머니, 부디 안녕히 계세요. 다시 만날 그때까지”라고 했다. 이제 우리도 선생께 “선생님, 들리지 않으시지요. 그래서 마음 놓고 부릅니다. 선생님, 부디 안녕히 계세요. 다시 만날 그때까지”라는 작별 인사를 드려야 한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부단히 현실을 부정하여 나날이 새롭게 사는 길밖에 없다”라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기자명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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