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도둑질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아빠(릴리 프랭키)였다. 그날도 아들(조 가이리)과 함께 온 가족의 일용할 양식을 훔쳐 돌아오는 길, 추위에 떨고 있는 한 여자아이(사사키 미유)를 보았다. 너무 가여워 보여서 집으로 데려왔다. 너무 배고파 보여서 밥을 먹였다. 너무 졸려 보여서 잠을 재웠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그렇게 아이는 이 가족에 스며들어 막내가 되었다.

말하자면 ‘구조’였지만 따지고 보면 ‘유괴’였다. 하지만 엄마(안도 사쿠라)는 유괴가 아니라고 우긴다. 더 나쁜 환경에서 덜 나쁜 환경으로 아이를 옮긴 거니까 잘한 일이라고 믿는다. 할머니(기키 기린)도, 엄마의 동생(마쓰오카 마유)도, 그런 엄마에게 딱히 뭐라 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가족이 늘어난 게 처음이 아닌 눈치다.

하지만 곧 닥쳐오는 위기. 사라진 아이의 행방을 쫓는 경찰 때문에 그들의 오붓한 동거가 위협받는다. 남들 눈엔 이상하게만 보이는 이 가족의 수상한 비밀이 하나둘 드러난다. 세상 어느 가족과도 비슷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세상 모든 가족과도 닮아 있는 이들의 이야기에 올해 칸 국제영화제는 황금종려상을 안겼다.

“당신은 영화의 등장인물을 도덕적으로 심판하지 않는다. 아이를 버린 어머니도 단죄하지 않는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2004)가 같은 영화제에 초청됐을 때, 기자와 평론가로부터 “가장 많이 질문받거나 지적된 점”은 이거였다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에세이집 〈걷는 듯 천천히〉에 썼다.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영화는 남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감독은 신도 판사도 아니다. 악인을 설정하는 것으로 이야기(세계)는 알기 쉬워질지 모르지만, 반대로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관객들이 이 영화를 자신의 문제로 일상에까지 끌고 들어가도록 할 수 있지 않나 싶다(〈걷는 듯 천천히〉 중에서).”

14년이 지난 올해, 다시 칸에서 받은 질문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놓은 대답 역시 달라졌을 리 없다. 그는 이 가족을 심판하려고 영화를 만든 게 아니다. 관객을 배심원 자리에 세우는 장면도 더러 있지만, 대체로 방청석에, 때때로 증인석에 앉힌다. 그들은 왜? 나라면 어떻게? 두 가지 질문이 마치 시소처럼 관객 마음속에서 번갈아 솟아오르는 것이다.

“아빠는 이제 아저씨로 돌아갈게”

카메라를 쳐다보며 말없이 눈물을 훔쳐내는 배우 안도 사쿠라의 손끝이, 우리의 섣부른 판단까지 함께 훔쳐낸다. “아빠는 이제 아저씨로 돌아갈게”라고 말하는 배우 릴리 프랭키의 좁은 등이, 우리의 안쓰러운 시선을 짊어진 채 휘청거린다. “(결점을 가진 인간들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는 감독의 오랜 열망이 또 한 번 멋지게 실현된 영화. “소리치기보다 속삭이기를 택하는, 미묘하고 힘 있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갈등과 이슈를 포착해내는 감독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말고 누가 있을까?” 〈할리우드 리포터〉의 한 줄 평이 딱 내 마음 같은 영화. 남몰래 혼자만 간직하고 싶다가도, 이 좋은 걸 나만 알고 있기 미안해서 또 얼른 모두에게 나눠주고 싶어지는, 바로 그런 영화.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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