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란 노무사가 쓰레기 더미 앞을 서성였다. “그래도 이건 가져가고 싶은데….” 방진복 입은 사람 모양의 작은 팻말에는 ‘No More Death in Samsung’ ‘직업병 책임져라’는 손 글씨가 적혀 있었다. 망설이던 이 노무사가 결심한 듯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사무실로 옮겨갈 짐 위에 팻말 두 개를 얹었다. 잠시 그늘에서 쉬고 있던 김시녀씨가 벌떡 일어났다. “아유, 안 돼. 버려, 버려. 이런 거 챙기면 우리 또 (농성)해야 돼.” 옆에서 천막 철거를 돕던 다른 활동가가 한마디 보탰다. “버릴 땐 과감해야 해요.”

7월25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8번 출구 삼성 사옥 앞. 가만히 서 있어도 등줄기로 굵은 땀이 흐르는 더위가 한창이었다. 이날 3평 남짓한 맨바닥 위에 올렸던 반올림 농성 천막이 1023일 만에 해체됐다. 천막은 3년 전에 세울 때와 마찬가지로 반올림 가족과 활동가들 손으로 직접 허물었다. 비닐을 걷은 자리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고스란했다. 솥단지·소화기·비닐우산·쓰레받기…. 별거 없어 보였던 천막 안 자질구레한 살림의 속살이 드러났다. “이사가 이렇다니까.” 김시녀씨가 결국 눈물을 보였다. “안 그래도 내가 모순이라고 그랬어. 만날 이 농성 언제 끝나냐고 해놓고, 좋게 잘 끝나서 치우는데 왜 우냐고.”

ⓒ윤성희7월25일 ‘농성 마침 문화제’가 끝나고 황상기씨가 딸 유미씨의 영정을 쓰다듬고 있다.
2015년 10월7일 돗자리 한 장, 침낭 몇 개로 시작한 농성이었다. 겨울과 여름을 세 번 나는 동안 ‘강남역 8번 출구 5성급 호텔’로 불렸던 농성장 천막은 김씨 손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천막에 얹을 하우스 비닐 따위를 이고 진 채, 휠체어를 탄 딸 한혜경씨와 함께 대중교통으로 춘천과 강남역을 오갔다. 딸 한씨는 삼성 LCD 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에 걸려 투병 중인 ‘삼성 직업병’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

‘유미들’ 위해 물러설 수 없었던 시간

짐 정리가 마무리될 무렵, 김씨는 이종란 노무사가 만지작거리던 팻말을 쓰레기 더미에서 찾아 슬그머니 들고 돌아왔다. “노무사님이 아쉬워하니까 나도 괜히 마음이 쓰여서. 에이, 가져갑시다.” 이 노무사가 활짝 웃었다. “너무 많이 들었던 팻말은 미련이 남나 봐.” 팻말을 반올림 사무실 어디에 놓을지도 정해졌다. “사무실 창문에 붙여. 거기 햇빛 많이 들잖아.”

여기까지, 이만큼 오는 데 11년이나 필요했다. 농성장 천막 철거 전날인 7월24일 오전 반올림과 삼성전자는 법무법인 지평 대회의실에서 만났다.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이하 조정위원회)’가 제안한 제2차 조정 재개를 위한 중재 방식 합의문에 서명하기 위해서다. ‘중재 방식’은 협상 당사자들이 최종안이 나오기 전 합의하는 방식이다. 조정위원회에 합의 내용을 백지 위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리 합의문에 도장을 찍음으로써 조정위원회가 앞으로 마련할 중재안을 양측이 ‘무조건 따른다’는 의미다. 조정위원회는 8~9월에 중재안과 실행 방안을 마련하고 10월 중 확정 및 발표할 예정이다. 중재안에는 직업병 피해자에 대한 보상 절차와 방안, 삼성전자의 사과, 재발 방지 및 사회 공헌 등의 내용이 담긴다.

ⓒ윤성희서울 서초구 삼성 사옥 앞에서 1023일 만에 천막 농성을 마치며 ‘삼성 직업병’ 피해자 한혜경씨(앞줄 가운데)와 반올림 활동가들, 시민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3년 전 여름, 이미 한 차례 중재안이 나왔다가 엎어졌다. 2014년 12월 발족한 조정위원회는 노동법 전문가인 김지형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정강자 교수(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와 백도명 교수(서울대 환경보건학)를 위원으로 꾸렸다. 조정위원회가 2015년 7월23일 발표한 1차 조정안은 ‘삼성전자가 독립적 공익법인을 세워 피해자 보상 절차를 진행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반올림은 찬성했지만 삼성전자와 반올림에서 나온 피해자들이 따로 꾸린 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가 반대하며 1차 조정은 합의에 실패한다. 이후 삼성전자는 자체 보상안을 발표하고 보상을 시작했다. 연말까지 신청하지 않으면 보상에서 제외하겠다고 발표하며 가대위 외 피해자들을 압박했다. 삼성전자의 일방적인 보상 진행으로 조정위원회의 조정 절차는 무시됐고, 이후 조정 역시 기약 없이 표류했다.

반올림이 삼성 사옥 앞에 천막을 치고 ‘대책 없는’ 농성을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론도 좋지 않았다. 대다수 언론은 삼성전자의 자체 보상을 근거로 ‘삼성 백혈병’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도했고, 조정안을 수용한 반올림은 되레 무리한 요구를 하는 단체가 되었다. 반올림은 삼성 직업병 문제가 끝나지 않았다는 걸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라도 거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삼성전자를 다시 교섭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도 천막을 포기할 수 없었다. 물론 이 농성을 1023일이나 이어가야 할 줄은, 반올림도 예상하지 못했다.

ⓒ시사IN 이명익7월24일 반올림과 삼성전자는 조정위원회가 제안한 ‘삼성전자·반올림 중재 방식 합의문’에 서명했다.
2016년 촛불과 탄핵, 대선 국면을 거치면서 정치권의 협상 노력 역시 근근이 이어졌다. 조정위원회도 올해 초 삼성전자와 반올림 모두 기본적으로는 합의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며 중재 방안을 찾기 위해 애썼다. 반올림 활동가 공유정옥씨는 수많은 논의와 합의가 실패할 때마다 “때때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1000일이 와버리면 어쩌지’ 했는데 정말 1000일이 와버렸다. 그러고도 22일이 더 지나서야, 문제 해결로 가는 길이 새로 열렸다. 반올림의 이성민 노무사는 서명식 이후 최근 들어 가장 많은 전화를 받았다. “최근 6개월 동안 받은 전화보다 어제 오늘 받은 전화가 더 많은 것 같아요. ‘나도 직업병 피해자인 것 같다’라고 새로 전화 주시는 분도 있고, 반올림에 함께하셨다가 산재 인정이나 보상을 포기했던 분들도 있고…. 일단 기본적인 정보만 파악했고, 이제 순차적으로 연락드려야죠.”

합의문에 반올림 대표로 서명한 황상기씨는 천막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면서 잠을 설쳤다. “힘들었죠. 그래도 오기 싫다고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화나고 속상하면 못 버텨요” 11년째 속초와 서울을 오가는 ‘유미 아빠’ 황씨의 검정 배낭 안에는 늘 양말·칫솔·치약·수건 그리고 갑작스러운 일에 대비한 얇은 점퍼 하나가 들어 있다. 이번 합의로 더는 한뎃잠 잘 일이 없게 된 황씨를 제일 반긴 건 속초에 있는 아내였다.

황씨는 7월24일 서명식 당일과 7월25일 ‘농성 마침 문화제’에서 발표할 인사말을 사흘에 걸쳐 쓰고 다시 고쳐 썼다. “컴퓨터를 할 줄 알면 좋은데 못하니까, 조금 쓰고 또 생각하고, 버리고 다시 쓰고 그랬어요.” 황씨의 거의 모든 말과 글은 “우리 유미가…”로 시작한다. 인사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삼성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했던 황씨의 딸 유미씨는 2007년 3월6일 급성골수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황씨는 딸을 데리고 병원을 오가며 같은 공장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유미와 같은 병을 앓거나 치료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딸의 죽음이 근무 환경과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가졌던 황씨가 아니었다면 반올림도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11년은 황씨가 수많은 ‘유미들’을 위해 물러섬 없이 앞장선 시간이기도 했다.

꼬깃꼬깃한 A4 용지 넉 장, 황씨가 육필로 쓴 원고에는 고마운 사람으로 가득했다. 물론 삼성전자와 정부에 대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돈 없고 힘없고 가난한 노동자가 작업 현장에서 화학약품에 의해 병들고 죽어갔는데, 1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해결하지 못한 건 참으로 섭섭한 일입니다. 정부에도 회사에도 존재 이유를 안 물어보려야 안 물어볼 수가 없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말아야 합니다.”

노동안전 문제 전환점 만들어내

반올림의 싸움은 50년 넘게 산업재해에 대해 보수적으로 판단해왔던 정부를 움직였다. 직업병 산재 불승인이 남발되고 있는 현실을 드러냈고, 제도 개선을 이끌었다. 2013년에는 직업성 암 인정 기준이 확대되었고, 역학조사에 대한 부분적 개선도 진행됐다. 공장 내 화학물질 독성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직업병은 노동자가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가 반증하지 못하면 산재로 인정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주장하며 ‘기업 친화적’인 노동안전 문제의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피해자 가족인 황상기씨, 김시녀씨와 반올림은 7월25일 저녁 문화제에 모인 사람들을 위해 상장 200여 장을 특별 제작했다. 이름하여 ‘최고의 연대상’이 그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졌다. 1023일의 천막 농성이 그 안에 모두 담겨 있었다. “봄기운처럼 싱그러웠고, 더운 여름 얼음처럼 시원했고, 한줄기 가을바람 같았고, 추운 겨울 핫팩 같았던” 사람들의 도움에 감사하는 내용이었다. 휠체어 위의 한혜경씨는 축하공연이 이어지는 동안 맨 앞줄에서 힘겹게 노래를 따라 부르며 팔을 높이 들었다. “우리는 후퇴를 모른다. 우리는 패배를 모른다”라는 가사였다.

무대 옆 황유미씨의 영정 뒤에는 황씨 어머니 박상옥씨가 2016년 추모제 당시 쓴 편지가 인쇄돼 있었다. 어머니는 이미 2년 전 이 싸움의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다. “아빠가 왜 네가 병에 걸렸는지 원인을 밝혀내겠다던 약속 지켰다. 우리가 이겼거든. 우리는 지치지 않고 잘 살 거야. 지금은 헤어져 있지만 다시 만날 때까지 울지도, 슬퍼하지도, 아프지도 말자. 심심하면 그곳에서 멋진 남자친구 하나 사귀고 잘 놀고 있어. 엄마는 아빠랑 네 동생 좀 더 보살피다 나중에 갈게.”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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