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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러 접경지에서 통일 시대를 상상하다

2018년 08월 15일(수) 제569호
블라디보스토크·남문희 기자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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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IN> ‘2018 함께 걷는 길’ 행사의 일환으로 6박7일간 독자 30여 명과 북한·중국·러시아 접경지를 둘러보았다. 오랜 기간 한반도 문제를 천착해온 남문희 기자가 동행했다.

4·27 남북 정상회담, 6·12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중국·러시아(북·중·러) 접경 지역은 어떻게 출렁이고 있을까. 7월14일 6박7일 일정으로 <시사IN> 독자 30여 명과 함께 북·중·러 접경 지역을 살펴봤다. <시사IN>이 주최한 ‘2018 함께 걷는 길’ 행사의 일환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도착한 7월14일 신한촌 기념탑과 박물관, 독수리전망대를 둘러보는 것으로 가벼운 일정을 소화했다. 이튿날 ‘강행군’이 예정돼 있었다. 7월15일 오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80㎞ 떨어진 북·중·러 국경 도시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다시 연해주 크라스키노까지 100㎞, 모두 합쳐 약 390㎞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했다.

동선만으로 따지면 합리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육로로 러시아-중국 국경을 넘으려면 크라스키노를 거쳐야 한다. 크라스키노 마을 한복판을 꿰뚫고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길이 바로 중국의 훈춘 세관으로 이어진다.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독립군들이 연해주에서 북간도로 넘어가고 넘어오던 그 길이다.

크라스키노가 중요한 것은 국경 통과 때문만은 아니다. 1910년대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까지, 들불처럼 번졌던 연해주 한인 독립운동 저력이 바로 이 일대에서 형성됐다. 이곳에서 한인들이 어떻게 힘을 키울 수 있었는지 이해하는 것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다. 그저 잠깐 둘러보는 것으로는 연해주의 여느 시골 마을과 다름없는 인상이다. 하산 승전기념비가 서 있는 마을 뒷산에 올라서야 이곳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왼쪽으로 보이는 포시에트 만과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는 훈춘 가는 길, 그리고 하바롭스크 주둔 김일성 부대의 전초기지가 있었다는 오른편의 산봉우리 등이 크라스키노의 심상치 않은 내력을 증언한다.

크라스키노의 원래 지명은 노보키옙스크였다. 1936년 3월25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미하일 크라스킨 중위를 기념해 그해 5월10일 크라스키노로 이름이 바뀌었다. 1867년 노보키옙스크 항이 개항했고, 당시 도시를 가르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남영(南營)과 북영(北營) 등 군부대가 주둔했다. 주변의 한인들은 이를 연추영(延秋營)이라고도 했다. 한인들은 이곳을 두만강 건너 위치한 한인들의 두 번째 정착지 연추와 동일시했다.

ⓒ시사IN 안희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독수리전망대에서 바라본 금각교. 이 다리는 블라디보스토크 항만을 가른다.
한인들의 첫 번째 정착지는 1863년 함경도에서 13가구가 이주해 세운 지신허이다. 지신허의 인구가 늘어나자 서쪽으로 14㎞ 떨어진 자리에 세운 곳이 바로 연추다. 연추라는 지명은 발해의 동경 용원부 염주성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진다. 상연추는 1864년, 하연추는 그곳에서 11㎞ 떨어진 위치에 1865년 세워졌다. 반병률 한국외대 교수에 따르면 크라스키노에서 약 10㎞ 떨어진 추카노프라는 마을이 하연추가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즉, 한인들이 살던 연추와 당시의 군 요새였던 노보키옙스크(크라스키노)는 약 10㎞ 떨어져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거리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인들은 이곳을 연추와 동일시했고 심지어 이곳의 군영을 연추영이라 불렀다. 군 주둔지가 흉년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온 한인들의 삶의 터전이자 번영의 발판이었기 때문이다. 한인들은 군 주둔지의 각종 토목공사에 참여하고 군납업을 통해 재산을 모았다. 그 재산으로 교육 사업을 벌여 인재를 양성하고 후에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연해주 한인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크라스키노·연추 둘러싼 연해주 한인의 역사


최재형 선생은 아홉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로 건너왔다. 블라디보스토크 기숙학교 등에서 러시아어를 배웠다. 선원, 경찰서장 통역사 등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최 선생은 포시에트 항 물류를 활용해 군납·무역·임대업 등으로 재산을 모았다. 후에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을 지원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된 <대동공보>와 <대양보> 등 언론사도 운영했다. 또 장학 사업과 독립운동 등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영국인 이저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저술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을 보면 연추 지역을 방문한 생생한 기록이 남아 있다. 189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증기선을 타고 7시간 걸려 60마일 거리의 포시에트 항에 도착한 비숍 여사는 “강건하고 윤택해 보이는 한인들이 60마리의 매우 살찐 소를 몰고 증기선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목격했다”라고 썼다. 당시 포시에트 만은 ‘멋진 막사와 상점이 있는 커다란 군 주둔지’였다. 군부대에 소고기를 공급하는 이들이 한인이었다. 한인들은 멀리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소고기 납품업을 장악하고 있었다. 비숍 여사는 한인들이 “중국 만주로 들어가 여윈 소를 사서 육류용으로 살찌게 만들었다”라고 기록했다. 비숍 여사가 연해주 일대에서 목격한 한인들은 탐관오리들의 폭정에 신음하는 무기력한 백성들이 아니었다.

ⓒ시사IN 안희태

안중근 의사가 11명의 동지와 맺은 단지동맹 기념비.
접경 지역의 물류를 적절히 활용해 부를 쌓은 한인들의 성장세는 대단했다. 행정과 교육·종교의 중심지가 된 연추는 1906~1907년경 연해주 남부 최대 한인 마을로 거듭났다. 연해주 남부에는 연추를 중심으로 남칠사(南七社)라는 한인 마을 7곳이 있었다. 한인 마을에는 러시아정교회와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소학교 외에도 조선의 전통 서당 등이 있었다. 조선의 풍습을 지키면서도 러시아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도 열심이었다.

연추를 중심으로 한 한인 마을이 의병운동의 중심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의병운동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중심으로 한 교육문화 운동으로 확대됐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중심 지역은 시내 중심가인 개척리였다. 하지만 1911년 일제와 제정러시아의 압력으로 지금의 위치인 변두리로 밀려났다. 일제의 압박이 계속되자 북쪽 지역인 우수리스크가 독립지사들의 새로운 거점이 되었다. 연추의 도헌(자치기관 책임자)을 지낸 최재형 선생의 생가가 현재 우수리스크에 남아 있는 이유다.

ⓒ시사IN 남문희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 선생 생가(위). 그는 재산을 모아 독립운동 등에 자금을 지원했다.
7월15일 방문 당시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 선생의 생가 내부는 기념관으로 고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생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우수리스크 중앙공원이 있다. 중앙공원은 최재형 선생과 안중근 의사가 만나 거사를 모의했다고 전해지는 장소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3월 연추에서 11명의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결성하고 3년 안에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처단하지 못하면 자결하기로 결의했다. 그해 10월26일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한 안 의사는 우수리스크에서 동청철도를 타고 하얼빈에 잠입해 거사를 단행한다. 단지동맹 기념비는 크라스키노 마을 외곽에 조성되어 있다.  

크라스키노와 연추를 둘러싼 연해주 한인 역사는 북·중·러 국경의 빗장이 열리려는 오늘날 우리에게 여러 시사점을 남긴다. 물류의 흐름을 선점하고 지혜롭게 이용하는 세력이 살아남게 된다는 점이다. 100년 전 선조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그 가능성을 이미 보여주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떤가?

4·27 판문점 선언을 접하고 ‘드디어 국경이 열리겠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2011년과 2012년 그리고 2014년에 다녀왔던 옌볜 지역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중국은 지린성과 헤이룽장성 물류 문제 해결을 위해 나진항·청진항 개발 및 사용권을 획득하고자 애쓰고 있었다. 생전 장성택 북한 노동당 행정부장은 이 계획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2013년 12월 장성택 부장 숙청 뒤 북한은 다시 움츠러들었다. 2014년 방문 당시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100년 전 연해주 한인들의 성장에 필수적이었던 포시에트 항은 이웃한 자루비노 항과 더불어 1990년대 이래 두만강 개발의 주요 항구였다. 북한의 나진, 중국의 훈춘과 함께 두만강 개발을 위한 ‘황금 삼각지’로서 명성을 유지해왔다. 포시에트 항과 자루비노 항을 일정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이유다. 한때 대표 군항이었던 포시에트 항은 요즘 항구로서 제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수심이 얕은 데다 토사가 쌓여 대규모 준설공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두만강에 가까워 구한말 연해주 한인들의 물류 기반이었고 1990년대 두만강 개발의 거점으로 각광받던 곳이 항구 기능조차 못할 정도로 쇠락해 있었다. 포시에트 만 일대는 현재 고급 별장지로 각광받는다고 한다.

대신 이웃한 자루비노 항이 물류 허브로 뜨고 있었다. 그동안 북한 나진항을 노리던 중국이 북핵 문제로 진전이 없자 자루비노 항을 대안 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루비노는 중국의 훈춘 세관에서 도로로 70㎞ 떨어져 있어 육상 접근이 가능하고 훈춘에서 하산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이어져 있기도 하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이곳을 장기적으로 극동의 물류 허브로 키우려 하고 있다. 아직은 물동량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7월15일 오후 이곳을 찾았을 때 항구 옆 야적장에 알루미늄 괴가 쌓여 있을 뿐 한산해 보였다. 알루미늄 괴는 일본으로 실려 나갈 예정인데 이마저도 흔치 않은 일이라고 한다.

자루비노 항은 유엔 제재로 고통받는 북한 측과 밀수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현장이기도 하다. 특히 북한 나진항과의 거래가 활발하다. 나진항은 자루비노 항에서 남쪽으로 20㎞ 내려간 곳에 있다. 날씨가 좋으면 나진항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다. 개인들이 연락을 취해 밀거래선을 통해 야밤에 몰래 원유 등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유엔 제재가 지속되고 있지만 접경 지역에서 사적으로 이뤄지는 거래까지 막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나진으로 들어간 원유는 중국인들이 1998년 투자해 비밀리에 만들어놓은 정유시설에서 정제되어 평양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세 차례 방중 이후 중국 측의 단속도 느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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