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양. 28년 전인 1990년 육군 이등병 신분이었던 그는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를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로 바꾸게 만든 주인공이다. 군 입대 직후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망원(스파이·프락치)’ 활동을 강요받다가 양심의 가책으로 보안사 민간인 사찰 문건을 들고 나와 폭로했다. 세상이 뒤집히고 보안사는 기무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기무사가 다시 군사안보지원사령부(안보지원사)로 바뀐다.

기무사 개혁 과정에서 ‘윤석양 이병의 보안사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이 관심을 끌고 있다. 윤석양씨는 그동안 언론과 인터뷰를 꺼렸다. 지난해 JTBC 프로그램에 한 차례 출연한 것 말고는 28년 동안 언론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윤석양씨가 8월8일 〈시사IN〉 편집국을 찾았다. 윤씨는 언론 노출을 기피한 이유에 대해 “양심선언자로 영웅시하는 세간의 시선에 큰 부담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 전후 오랜 세월 감내해야 했던 정신적 트라우마가 그를 ‘경계인’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그는 폭로 사건 후 13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트라우마를 떨치고 사회에 적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시사IN 신선영윤석양씨는 ‘폭로 사건 후 13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트라우마를 떨치고 사회에 적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소련이 붕괴되고 동·서독이 통일되던 1990년 5월1일 군에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전방 사단에 배치된 지 10여 일 만에 보안사 요원들이 들이닥쳐 연행되었다.” 보안사는 스물네 살 윤 이병을 서빙고 대공분실로 끌고 갔다. 당시 그는 학생운동을 하다 제적된 뒤 노동운동 조직인 ‘혁노맹(혁명적 노동자계급 투쟁동맹)’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었다. 군에 입대한 혁노맹 출신이 보안사에 끌려와 그에 대해 진술해, 윤 이병도 붙잡혔다. 보안사는 윤 이병에게 혁노맹 팀장 격인 박○○씨를 체포하는 데 협조하라고 요구했다. 처음 사흘 동안은 버텼다. 공포가 엄습했고, 그는 무너졌다. “서빙고 분실 밑에 한강으로 통하는 방이 있는데 의자에 앉혀놓고 버튼만 누르면 변사체가 돼 한강으로 떠내려간다고 했다. 협조하지 않으면 나를 그 의자에 앉혀 버튼을 누르겠다고 위협하더라. 탈진과 공포감 속에 자포자기 심정이 됐다.”

윤 이병은 당시 보안사가 시키는 대로 홍익대 앞으로 선배 박○○씨를 유인했고 박씨는 체포되었다. 그날 밤 보안사는 윤 이병에게 수고했다며 서울대 앞 술집 ‘모비딕’으로 데려가 회식을 시켜주었다. 이 술집은 보안사가 운영하는 ‘망원 아지트’였다고 한다. “모비딕에서 서빙을 하던 알바생이 서빙고 분실에서 근무하던 병사였다. 망원들이 자기 동료나 선후배를 데리고 와서 이런저런 얘기하는데 도청 장치가 미리 설치되어 있었다. 모비딕은 집회 시위 등의 정보를 알아내는 용도로 보안사가 운영한 곳이다.”

선배 박○○씨를 체포하도록 협조한 일로 윤 이병은 보안사의 신임을 얻었지만 마음은 지옥이었다. “선배를 유인해내 체포당하게 하는 극단적인 잘못을 하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더라. 내가 보안사에 끌려와 지금까지 무슨 짓을 했는지, 어떻게 속죄해야 할지 번민의 나날을 보냈다. 처음에는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본 ‘수상한 활동’을 기억해 나중에 나가면 써먹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가 본 보안사의 수상한 활동이란 광범위한 민간인 사찰이었다.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는 고위 장성과 치안감 이상 경찰 간부 아들들만 선별해 병사들이 근무를 서고 있었다. 나는 피의자이자 협조자로 그들 틈에 끼어 민간인 사찰에 대해 조심스럽게 파악했다.”


ⓒ연합뉴스1990년 10월4일,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폭로 기자회견을 한 당시 윤석양 이병(가운데).

‘협조자’ 윤 이병은 파일로 처리된 자료들을 직접 읽어볼 수 있었다. 보안사는 정치·사회·경제·종교·법조·언론·노동·교육 등 각 분야 지도자들을 사찰 대상자로 삼아 A·B·C·D 네 등급으로 나누어 동향을 파악했다. 사찰 활동을 통해 얻은 동향 첩보를 컴퓨터에 기록했다. 개인 신상 카드에는 인적사항, 가족사항, 해외여행 관계, 교우 및 배후 인물 등 9개 항목이 기록돼 있었다. 계엄령 선포에 대비해 사찰 대상자 자택의 담장 높이, 비상탈출구, 예상 도주로 및 은신처 정보도 들어 있었다. 주요 사찰 대상자로는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등 정치 지도자를 비롯해 김수환·윤공희·김관석·박형규 등 종교계 인사, 한승헌·조영래·문재인·박원순 등 법조계 인사까지 다양하게 포함돼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대상자 중 지금까지 4명이 대통령이 되었다(노무현·문재인·박원순·한승헌 등 148명은 1991년 6월27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998년 7월 대법원은 보안사가 헌법상의 사생활 비밀과 자유를 침해한 점을 인정하여 국가는 원고들에게 각각 200만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확정판결했다).

윤 이병은 사찰 자료를 직접 들고 나올 생각은 못했다. 자료를 수집하는 부서 및 담당 책임자와 역할 등을 꼼꼼히 정리해 이를 폭로할 계획이었다. 그러던 중 ‘반전’의 기회가 생겼다.

여자 친구의 〈말〉지 인터뷰 기사 그리고…

1990년 월간 〈말〉 10월호에 윤석양 이병 관련 기사가 보도되었다. 윤 이병의 여자 친구 입을 통해 윤 이병이 보안사에 끌려가 ‘망원’으로서 강요받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내용이었다. 보안사는 윤 이병이 입대 전 여자 친구 집에 두고 온 책과 자료를 받아오겠다고 외출 신청을 하자 요원과 함께 다녀오라고 허락했다. “보안사 요원과 여자 친구를 찾았더니 내가 보안사 협조자가 된 것을 눈치채고 ‘그러면 안 된다’고 귀엣말을 했다. 나는 ‘생각해둔 계획이 있으니 걱정 말라’고 답하고 서빙고 분실로 돌아왔는데 며칠 뒤 〈말〉지에 여자 친구를 인터뷰한 내 기사가 실렸더라.”

보안사는 발칵 뒤집혔다. 윤 이병을 관리하던 이○○ 계장이 “이중 스파이 짓 하는 거냐”라고 추궁했다. 사실이 아니라고 안심시켰지만 이 계장은 “마침 토요일이니 월요일 출근하면 두고 보자”라며 일단 퇴근했다. 윤 이병은 하늘이 도운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더 꾸물거릴 틈이 없었다. 그는 그동안 기억해둔 서빙고 분실 내 민간인 사찰 파일 보관 장소에 접근해 닥치는 대로 꺼내 챙겼다. 총 1303명 분량의 사찰 파일과 카드, 디스켓 등이었다. 1990년 9월23일 새벽 보안사 서빙고 분실을 몰래 빠져나왔다.

윤 이병은 학생 시절 대학 학보사에 잠깐 몸담았다. 그는 보안사에서 나온 뒤 학생운동 경험이 없던 학보사 친구 집으로 몸을 숨겼다. 윤 이병의 친구는 대학 학보사 출신으로 당시 언론노련에서 근무하던 한 선배를 불러냈다. 바로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이다. “한양대학교에서 은밀히 양정철 형을 만났다. 자료를 한번 훑어보더니 ‘국방부 장관과 보안사령관 목이 날아가겠구만’ 하고 중얼거리면서 학보사 출신인 〈한겨레신문〉 기자를 연결해줬다.”

1990년 10월4일 윤석양 이병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보안사 민간인 사찰을 폭로했다. 보안사에서 가지고 나온 자료도 공개했다. 정치계·노동계·종교계·재야 등 각계 주요 인사와 민간인 1303명을 상대로 보안사가 벌인 불법 사찰이 드러났다. 그가 갖고 나온 자료는 동향 파악 대상자 색인표 1303장 외에도 4명(노무현·문동환·이강철·박현채)의 개인 신상 카드, 개인별 동향 파악 내용이 들어 있는 컴퓨터 디스켓 30장(447명분)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 내가 가지고 나온 보안사 자료 중에 공개되지 않은 게 있었다. 보안사 협조자인 ‘망원’ 목록이다. 링으로 철한 네모난 카드에 망원이라 쓰고 줄을 그어두었는데, 주로 대학가를 무대로 보안사 협조자로 활동하는 사람들이었다.”

윤 이병의 ‘양심선언’으로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국방부는 기자회견 다음 날인 10월5일 대변인 공식발표를 통해 폭로 문건이 보안사에서 작성한 것임을 시인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전시나 계엄령이 선포될 때에 대비해 적 또는 불순 세력으로부터 대상자들을 보호 및 차단하기 위해 작성된 자료로 정치적 목적의 대민 사찰과는 무관한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군의 축소 해명에 여론이 격앙되고 보안사 해체 요구가 거셌다. 결국 노태우 대통령은 당시 이상훈 국방부 장관, 조남풍 보안사령관을 경질했다. ‘공포의 고문실’로 악명 높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은 폐쇄됐다. 보안사는 ‘뼈를 깎는 심정으로 새로 태어나겠다’며 1991년 1월1일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로 명칭을 바꿨다.

윤 이병은 양심선언 뒤 서둘러 현장을 벗어나 보안사의 추적을 따돌렸다. 오랜 은신 생활에 들어갔다. 보안사가 그를 잡기 위해 고향집은 물론 친구·친인척 집을 오랫동안 감시했다. “서빙고에서 나왔을 때 잡히면 죽겠다고 생각했는데 두려움은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갖고 나온 게 부채의식이어서 그게 두려움을 이겨낸 거다.”

폭로 기자회견 직후 세상은 윤 이병을 ‘양심선언자’라고 평가했다. 또 KNCC는 1990년 윤 이병에게 ‘올해의 인권상’을 수여했고, 언론에서도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하지만 이 모든 찬사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속은 편치 않았다. 윤 이병은 서빙고에서 보안사에 협조할 때와 양심선언할 때 중에서 어느 게 진짜 자신의 모습일까 끊임없이 고민하고 괴로워했다. 도피 기간 내내 보안사 협력자로 살았던 옛 기억이 떠올라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이번에 군 정보기관 개혁 확실히 해야”

윤 이병은 2년의 도피 생활 끝에 1992년 9월24일 대구에서 보안사에 체포됐다. 그는 군무이탈죄가 적용돼 꼬박 2년형을 살고 1994년 11월 공주교도소에서 출소했다. 출소 뒤에는 보안사 ‘망원’에서 벗어나도록 용기를 준 그 여자 친구와 결혼해 자녀를 두고 자그마한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사회에 복귀해서도 그는 보안사에서 당한 국가폭력(망원 강요)이 안긴 정신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도피와 감옥 생활을 합쳐 4년 동안 내면에 갇혀서 타인과 담을 쌓고 지냈다. 그가 학생들에게 논술과 영어를 가르치는 일은 밥벌이 외에도 일종의 소통을 통한 치유의 과정이었다.

윤석양씨는 양심선언 이후 오랫동안 지속된 트라우마를 13년 만에야 비로소 극복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양심선언자라고 말하지만 보안사에 협력한 또 다른 면이 있었기에 고마움보다 민망함이 컸다. 그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는 내면의 혼란과 고통을 스스로 극복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은 것은 2003년 이후부터였다.” 윤씨는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위원장 이해동 목사)의 재조사에도 협력했다. 당시 과거사위원회의 조사 목적은 그가 들고 나온 1차 민간인 사찰 자료를 토대로 기무사가 업그레이드한 2차 자료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 결과 보안사는 노태우 정부 당시 공안 정국이 조성되자 비상계엄에 대비해 반정부 인사 목록을 만들고, 이들을 디데이 전후해 전원 검거한다는 예비검속 계획(작전명 ‘청명계획’)을 세우는 등 사실상 ‘친위 쿠데타’를 준비한 것으로 드러났다. 1989년 3월 당시 보안사는 계엄에 대비해 각계 주요 인사 923명의 인적사항, 예상 도주로, 예상 은신처, 체포조 등이 기재된 ‘청명카드’를 작성하고, 계엄 시 이들을 검거·처벌하기 위한 청명계획을 수립했다. 1989년 8월 을지훈련 기간에 8개 부대를 선정해 도상훈련까지 실시했다. 그러나 청명계획은 1989년 계엄령을 실시하지 않아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과거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당시 보안사가 작성한 개인별 신상 자료철(1만2100쪽)은 지금도 기무사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기무사 개혁과 관련해 윤석양씨는 확실한 변화를 주문했다. “기무사가 계엄령 문건을 만들고 대통령과 장관까지 감청한 것을 두고 충격으로 받아들이지만 힘이 커진 군사 정보기관의 기본 속성이다. 군 정보기관이 본연의 임무에서 일탈해 월권하지 않도록 이번에는 확실히 힘을 빼는 개혁을 해야 한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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