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다로운 인터뷰이다. 연출한 사진은 질색한다. ‘촬영에 응하다’와 ‘연출하다’를 기어코 구분한다. 빳빳하기 이를 데 없다. 그만큼 자기 음식에서도 까다롭게 기본을 지킨다. 요리사이자 음식 칼럼니스트인 박찬일 주방장은 ‘기본 중의 기본’부터 말했다. 음식점 종사자와 고객 모두를 위한 안전과 위생이다.

“칼 잡는 손이랑 음식물 쓰레기봉투 묶는 손은 따로여야 해요. 업계 현실은, 그렇게 인력을 쓰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죠. 하지만 기본을 생각하고 적정 인력을 배치하는 음식점이 있어야 하고, 앞으로 늘어나야죠. 세상에는 보고 배우고 실감한 덕분에 바뀌는 행동이 분명히 있어요.”

 

ⓒ시사IN 신선영박찬일 주방장(위)은 음식보다 이미지가, 요리사의 노동보다 쇼맨십이 부각되는 시대에 정직한 노동과 경영으로 음식의 본질을 추구한다.


금요일 오후 1시30분, 그와 만난 서울 서교동 ‘로칸다(Locanda) 몽로(夢路)’ 주방은 영업 개시를 앞두고 몹시 분주하다. 발을 디딜 때마다 주방 밖 나무 바닥은 뽀송뽀송하고, 감도는 공기는 깨끗하다. ‘기본’을 생각하며 음식점을 다니다 보면 눈에고 코에고 기어코 불쾌한 무언가가 걸릴 때가 있다. “영업 개시 전에 음식은 이미 승부가 나요. 문 열면 깔끔한 공기냐 거북한 냄새냐, 그것만으로도 그 집의 ‘준비’를 알 수 있어요. 이 업이 그래요.”

진작 만나고 싶었다. 본질보다 과시, 음식보다 마케팅이 앞서는 시대이므로 더욱. 음식보다 이미지가, 요리사의 노동보다 쇼맨십이 부각되는 시대에, 정직한 노동과 경영으로 음식의 본질을 추구하는 요리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몽로 내부는 유럽은 물론 한국과 아시아 곳곳의 분위기를 담은 실내 디자인 또는 소품으로 가득하다. 그 의도를 물으니 무심히 대답한다. “디자인에 국적이 어딨어!” ‘무국적 술집’을 내건 로칸다 몽로의 총감독이 보일 법한 반응이다. ‘로칸다’란 선술집, 여인숙, 혹은 여인숙을 겸한 작은 식당을 두루 이르는 포르투갈 및 이탈리아 말이다. ‘몽로’는 문자 그대로 꿈길이라는 뜻이되, 유래는 에밀 졸라의 소설 〈목로주점〉이다. 발음에 가져다 붙인 한자 ‘夢路’, 그리고 로칸다에서 목로주점(선술집)에 이르는 의미의 뒤섞임까지 과연 무국적 술집답다.

 

ⓒ시사IN 신선영로칸다 몽로가 내건 ‘무국적 술집’ 스타일은 인테리어와 음식 모두에서 묻어난다.


“〈목로주점〉에는 삶의 희망을 잃고 폭식 폭음에 빠져드는 인물이 있지요. 사람은 배가 고파서도 먹고, 마음에 허기가 져서도 먹어요. 배가 고프면 적당히 채우도록, 마음의 허기라면 살살 달래도록 적절한 음식을 내야겠지요. 왜 그렇게 냈는지 만든 쪽에서 설명할 수 없는, 요란함뿐인 음식이라면 허기에 허기만 더하지.”

몽로의 무국적성은 음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이탈리아에서 요리학교를 나온 주방장답게 파스타는 당연하다. 그런데 파스타에 명란이나 성게가 끼어든다. 말이 무국적이지 한국인이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음식의 기획, 맛의 설계가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밀가루 1㎏에 달걀노른자 40개를 푼 생면 반죽으로 만드는 명물 파스타 ‘콰란타’는 어떤가. 의도한 적 없다지만 이 방식은, 1670년 안동에 살던 여성 장계향이 쓴 조리서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 나오는 ‘난면법(卵麵法)’과 반죽 원리가 같다.

제주산 멜과 이탈리아식 안초비 사이

파스타의 부재료인 명란은 구이로도 변신한다. 한국인의 반찬인 명란에 이탈리아 페페론치노(이탈리아 고추. 시칠리아 시절의 요리 스승이 한국으로 부쳐준다), 마스카르포네(우유 크림의 일종), 그리고 계절에 따라 오이절임이나 사과 콩포트(과육을 살린 당졸임)를 더한다. 요리사의 상상력이 닿은 젓갈은 일품요리로 확장된다. 서교동을 지나던 한국인도, 페페론치노에 익숙한 지중해권 그 누구도, 마스카르포네가 그리운 유럽과 중앙아시아에 걸친 유목민의 후예도 반가워할 한 접시다.

소 힘줄과 곱창을 토마토소스에 뭉근히 끓이다 얼갈이며 시래기를 보태 바특하게 완성한 찜, 와인에 졸인 소 볼살 요리, 언뜻 천엽 조각도 보이는 벌집양 볶음에도 어떤 방향과 의도가 보인다. 그러고 보니 꽃등심에서 삼겹살까지, 온통 구이의 나라로 변한 한국에서, 내장까지 알뜰히 쓴 다양한 육류 요리법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은 오히려 이곳이다. 생양고기 소시지인 살시차, 젓갈에 무친 부추와 함께 나오는 차가운 이탈리아식 족발도 있다. “정육만 만져서는 훈련이 안 돼요. 선지, 힘줄, 족발, 양에서 대창, 소창… 손질하기 힘든 재료가 있어야 주방에서는 교육과 문화 전수가 가능하고, 손님은 ‘한 마리’를 먹을 수 있지요.”

 

ⓒ시사IN 신선영음식점에서 칼 잡는 손과 음식물 쓰레기봉투 묶는 손은 따로여야 한다. 그러나 업계 현실에서 쉽지 않다.


무국적 치킨도 있다. ‘박찬일식 닭튀김’은 동남아시아식 부재료로 닭고기를 감싸 튀기고, 중국과 이탈리아의 향신료를 더한다. 광어, 문어, 한치, 굴 등을 쓸 때도 한국인이 기막히게 다루는 법과, 이탈리아 또는 지중해 쪽 사람들이 기막히게 다루는 법을 아우르려 한다. 가령 싱싱한 제주산 멜(멸치)이 들어온 날이면, 주방 온 인력이 손끝에 가시에 찔려가며 대가리, 지느러미, 비늘을 치고 배를 딴다. 이탈리아식으로, 짠맛이 제대로 치고 올라오면서 개운하기 이를 데 없는 안초비를 담그기 위해서다. 이는 무국적일까, 동도서기(東道西器)일까. 요리사는 다시 한번 단호하다. 쓸데없는 말장난 더할 것 없다며 부연한다. 그저 요리사의 일이다. “기왕에 잡은 네발짐승, 날개 달린 놈, 물속 생명, 광합성하고 땅에 영양분 남긴 식물인데요. 고마운 줄 알고, 제대로 요리해서 갚아야지요. 기술자가 더 나은 방법을 찾는 건 당연하고.”

이렇게 차린 음식에, 기본적으로 젓가락을 낸다. 김치 또한 일품요리로 설정되어 있어 원한다면 따로 사서 먹어야 한다. 스테이크, 파스타, 안초비, 살시차, 마스카르포네 등에 젓가락질하는 동안 젓가락도 새롭게 다가오고, 기어코 값을 매긴 김치를 주문하면서 김치도 새로이 다가온다. 이 집의 무국적성은 한국인의 일상을 밀어내지 않는다.

말 나온 김에 질문을 확 틀었다. 요리에 음식 글쓰기를 겸한 사람이 보는, 오늘날의 먹는 이야기에 대하여. 기다렸다는 듯 칼럼니스트로 정체를 바꾸어 대답을 쏟아낸다. 그에 따르면 미디어란 사실 확인·교정·편집은 물론이고, 쓰는 쪽의 윤리와 태도를 전제로 하는 제도이다. 음식을 보는 대중의 시선과 상식·정보·시각, 그리고 대중의 음식 감수성이 혼란 속에 있는 시대이므로 윤리와 태도는 더욱 강력히 요청된다.

“SNS 기반의 개인 미디어와 인터넷이라는 통로가 무서운 게, 오류를 냈거나 잘못된 정보를 확대 재생산, 무한 복제하지만 교정·수정·삭제는 별로 없어요. 저마다 음식 평론가인데, 평론가는 원래 자신의 오류 가능성에 제일 민감한 사람입니다. 물어본 사람 없이도 혼자 아는 체할 때는 평론가인데, 오류 앞에서는 무책임하죠. 미디어상의 권력을 염두에 둔 계산된 막말이 넘치는 세상이잖아요. 전문가를 자처한 자의 책임감, 시민의 줏대가 함께 필요한 세상이죠.”

문득 식은땀이 난다. 먹는 이야기를 해서 먹고사는 나는, 박찬일 칼럼니스트에게 어떻게 보일까.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것만은 물어보자 했던 게 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3만원짜리 옷의 가치와 100만원짜리 옷의 가치가 다르다고 했다. 1000원짜리 양산 과자도, 1만원짜리 숙련 제과사의 과자 한 조각도 저마다 역할과 의의가 있다는 요지였다. 오늘날은 100만원짜리 옷이나 1만원짜리 과자를 접할 기회가 없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시대다. 10원부터 1000원까지 다양한 가격의 다양한 제품이 필요하다는 말 이상의, ‘가치론’을 듣고 싶었다.

“값이 두 배인 달걀이 반드시 두 배의 맛을 보장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닭이 건강하고, 사육 환경이 정돈된 만큼 더 행복해진 농민을 생각하면, 음식에서 ‘가성비’ 같은 말은 쉽게 나올 수 없죠.” 그가 잠깐 말을 끊었다가 잇는다.

“우리 집 음식은 기본 단가가 높아요. 그런데 적정 이윤은 못 남겨요. 달걀을 예로 들었지만, 생산자의 행복까지 생각한 재료, 칼 잡는 손과 쓰레기봉투 묶는 손을 따로 쓰는 비용, 숙련 인력으로 만든 결과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못 받고 있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비스’란 돈 내고 사는 것이에요. 하지만 음식이란 감정의 진폭이 담기는 마음의 매개체이기도 해서, 숙련된 인력은 계산 밖에서 ‘호스피탤러티(Hospitality· 접대)’의 편안함을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를 다만 가성비로만 따지면, ‘농민 생산자의 행복’, ‘칼 잡는 손 따로, 쓰레기봉투 묶는 손 따로’ 같은 이야기는 위축돼요.”

그는 자신이 요리하는 사람인 동시에 먹는 사람임을 강조했다. “우리 누구나 종사자인 동시에 손님입니다.” 먹고살기 위해 요리를 하지만, 진심으로 즐기기 위해 먹는 때가 많다. 즐기지만 탐식은 경계한다.

음식만으로 부족한 음식 이야기

“탐식은 사람을 교만(驕慢)하게 하고 방만(放漫)하게 하고 비만(肥滿)하게 하죠. ‘만’자만 세 개, 삼만! 그런데 탐식이 아니라 평소 음식을 가지고 성장하려는 마음과 태도가 있다면, 그 덕분에 사람이 좀 더 풍성해지고, 인간관계도 더 다채로워지고, 또 세상을 보는 눈도 넓어지죠. 그럴 만한 음식을 좀 하고 싶은데, 아, 가성비 참 힘들다.”

한여름, 말을 많이 한 요리사의 미간에 피곤함이 엿보인다. 곧 영업 개시다. 대화를 여물고, “잘 들었습니다” 하고 일어서는데, 어느 날 박찬일 주방장의 퇴근길에 그와 소주 한잔 주고받다가 엉겁결에 나눈 경구가 떠올랐다. 그때 함께 외친 한마디. “음식이 음식만 이야기하면 음식을 말할 수 없다.” 

기자명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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