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싶었다. 외환위기가 발목을 잡았다. 친구가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일본 어때?” 이일하씨(44)는 2000년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할 수 있다는 친구 말에 의지해 일본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병행이 가능하긴 했지만 전공 특성상 작품 촬영에 긴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낮에는 학교에서 다큐멘터리를 공부하고, 오후부터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졸업 후에도 이씨는 일본에 남았다. NHK 프리랜서 조연출을 했고, 한국 언론의 일본 취재를 돕는 코디네이터 구실을 하며 일본 구석구석을 누볐다.
이씨의 첫 다큐멘터리 영화 개봉작은 〈울보 권투부〉(2015)다. 일본 내 한인 사회에서 도쿄 조선학교 권투부의 연전연승이 화제였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취재가 재일조선인 소년들의 삶과 현실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됐다. 두 번째 영화 소재는 우연히 찾아왔다. 〈울보 권투부〉 촬영 중 이씨는 도쿄 신오쿠보의 코리아타운에서 집회 장면을 목격했다. 혐한 단체인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와 그에 맞서는 카운터스(혐오 표현을 반대하는 시민 모임)의 대치였다. 카메라를 들고 집회를 쫓아다니며 이 싸움을 기록했다.
취재 중 카운터스 활동 단체 가운데 한 곳인, 전직 야쿠자 다카하시가 이끄는 ‘오토코구미’에 가입했다. 오토코구미를 비롯한 카운터스의 활동은 재특회의 혐오 집회를 머릿수로 압도했다. 다른 활동가들이 주로 확성기를 활용해 소리를 지르거나 길을 가로막는 식의 ‘평화 시위’로 혐오 집회에 대응한다면, 오토코구미는 ‘폭력으로 혐오를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카하시는 시위 중 세 번이나 체포되기도 했다. 8월15일 개봉한 〈카운터스〉를 만드는 동안 이씨는 ‘정의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됐다. “사실 재특회는 적법한 활동이고, 카운터스는 불법이에요. 재특회는 신고한 집회를 진행하고, 카운터스는 그걸 방해하는 식이니까요. 적법한 혐오를 막아내는 불법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이씨는 얼마 전 18년의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이제는 한국 사회도 카메라에 담아보고 싶다. 그가 요즘 주의 깊게 보고 있는 건 제주도의 예멘 난민을 둘러싼 논란이다. 예멘 난민들을 향한 반대 논리와 가짜 뉴스가 재특회의 혐한 활동과 판박이였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 내 혐오 시위를 막아낸 이들은 각자의 직업과 가정을 가진 일반 시민이었어요. 자신의 사회 안에 있는 혐오를 마주한 사람들이죠. 〈카운터스〉를 통해 묻고 싶어요. 당신 안의 혐오는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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