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임기로 국회의원직을 마치기는 했으되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그 일생의 자취가 선연하게 빛나는 분들이 많아. 오늘은 그런 단선(單選) 의원 가운데 한 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꾸나. 김말룡(金末龍)이라는 분이지.

ⓒ연합뉴스1994년 2월 민주당 김말룡 의원이 국회 노동위원회 ‘돈 봉투’ 사건과 관련해
검찰에 출두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말룡은 1927년 경북 월성에서 태어났어.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큰형이 있던 일본으로 건너가서 중학교에 다니면서도 밤에는 세탁소 배달부, 토목공사장 인부 일을 하며 노동자로 성장해나갔지. 해방 공간에서 이미 대한노총 간부였고 1950년대 대구에서 수십 개 기업의 노조를 지도하는 거물급 노동운동가로 성장한 김말룡은 노동자의 권익보다는 정부 눈치 보기에 급급하고 부정부패의 온상으로까지 전락한 대한노총에 반기를 들었단다. 그 계기는 대한방직이라는 공장의 노동쟁의였어.

대한방직은 자유당의 재정부장인 설경동이 권력에 빌붙어 불하받은 곳이었어. 설경동이 마음대로 노동자를 해고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어용노조를 세우는 등 도를 넘어서는 행태를 보이자 노동자들이 저항했어. 그러나 ‘빽’ 좋은 설경동은 공권력을 동원해서 이들을 탄압했지. 김말룡은 대한노총 김기옥 위원장이 설경동이 제멋대로 만든 대한방직 어용노조를 인정하는 걸 보면서 대한노총에 대한 일말의 기대마저 접어버리게 돼. “뒤집어엎어 버리자!”  

1959년 8월 대한노총 김기옥 위원장 체제에 반기를 든 노동자들이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를 조직했어. 대한노총 541개 단위노조 중 311개, 노조원 27만명 중 14만명이 대한노총을 탈퇴하고 전국노협에 가입하겠다고 선언했어. 이 전국노협 의장으로 추대된 이가 바로 김말룡이야. 4·19가 일어나고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면서 노동자들은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을 출범시키지만 바로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로 된서리를 맞게 돼. 박정희 정권은 노동자들의 자주적 권리를 부정하고 한국노총(대한노총 후신)으로 헤쳐 모여를 명령했거든. 김말룡은 이에 저항하다가 구속되고 말았어. 이후로도 여섯 번이나 거듭되는 감옥살이의 시작이었지.

1970년대 중반 이후 노동운동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노동운동은 오히려 새롭게 시작됐어. 1978년 가톨릭 노동상담소를 차린 거야.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불사르며 분신했듯, 노동자를 위한 법은 있어도 유명무실하고, 노동자의 권리란 ‘100억 불 수출’ 목표 아래 봄눈보다 더 빨리 사라지던 시절, 김말룡은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들의 몇 안 되는 친구였지. 노동쟁의 중 회사의 사주를 받은 남자 사원들이 여성 노조원들에게 똥물을 퍼붓는 만행을 부렸던 동일방직 사건 때 김말룡은 동일방직 해고자들과 함께 거리에서 싸웠어. 강원도 사북에서 광부들이 어용노조 타도를 외치며 일어났을 때 누구보다 빨리 그곳으로 달려간 사람도 그였어.  

노동 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아 1992년 총선에서 그는 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추천됐고 제14대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어. 하지만 그는 국회의원이랍시고 목에 힘주고 어깨 굳힌 채 회전의자를 돌리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어. “원진레이온 진상조사 활동을 벌이며 작업환경 측정과 노동자 건강검진 시에 노조 대표나 노동자 대표가 참여하도록 제도화할 것을 촉구했고, 산업재해보험법 개정을 추진했다. (…) 복수노조 설립, 공무원과 교원노조 보장, 제3자 개입금지 삭제, 노조 운영의 민주화 규정 등 노동조합법 개정 투쟁에 앞장선 것도 김말룡이었다. 쓰레기 매립 시설, 정수장 수질 관리, 골프장 건설 억제, 농촌 회생에 이르기까지 김말룡은 홀로, 아무도 하지 않은, 많은 일들을 했다(〈레디앙〉 2010년 2월3일).”

읽다 보면 그가 손을 대지 않은 곳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야. 그의 생애를 아는 사람들은 고사성어 ‘우공이산’의 전형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더구나. 알아주는 이 없고 빛나 보일 일 없어도, 언제 끝날지 언제 한숨 돌릴지도 모르는 일들을 묵묵히 수행해왔던 거야.

그때 그 국회 노동위 ‘돈 봉투’ 사건

그런데 국회의원 시절 그는 뜻밖의 사건으로 세간의 화제가 돼. 1993년 가을 국회 노동위원회는 상습적인 노사쟁의가 일어나는 여섯 개 기업 사장들을 증인으로 불렀지만 다들 콧방귀를 뀌었지. 포항제철(현 포스코) 회장은 아예 참석하지도 않았고 한국자동차보험 사장 등은 조사 내용과 동떨어진 대답을 고집한 거야. 이에 위증과 불출석 혐의로 고발하자는 의견이 대두됐지만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시 야당 소속이었던 노동위원장은 미적거리기만 했어. 이 지지부진한 상황이 석 달을 끄는 데에 격노한 김말룡 의원은 제대로 된 한 방을 터뜨린단다.

“지난해 11월12일 밤 11시께 귀가해보니 과일 바구니와 쇼핑백이 있었다. 과일 바구니는 배달된 것이었고, 쇼핑백은 평소 등산을 같이 다녀 안면이 있던 자보(한국자동차보험)의 박장광 상무가 놓고 간 것이었다. 쇼핑백을 열어보니 도장이 여럿 찍힌 누런 봉투가 들어 있었다. 봉투를 뜯어보니 하얀 봉투가 나왔는데, 그 속에 돈으로 짐작되는 네모꼴 물체가 들어 있었다. (…) 다음 날 돈을 돌려보냈다. 돈을 돌려준 3~4일 뒤 만났을 때 박 상무는 세 번이나 ‘다른 의원은 다 받으시는데 왜 그러시느냐’라고 말했다(〈시사저널〉 1994년 2월10일).”

노동위원회 전체가 뒤집혔고 조사가 시작됐지만 이 폭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김말룡을 치매 걸린 노인으로 몰면서 자신들의 혐의를 부인했어. 제 발 저린 국회의원들은 동료 의원인 김말룡을 ‘증인’ 신분으로 증언하도록 (즉 뭔가 사실관계가 어긋난 점이 있으면 처벌받도록) 몰아붙였단다. 자신들의 역린을 건드린 데 대한 치졸한 복수였다고나 할까. 우여곡절 끝에 김말룡과 박 상무가 만났던 음식점 주인의 아들이 용기 있게 사실을 증언함으로써 ‘돈 봉투’ 사건은 결국 김말룡 의원의 승리로 끝났어. 하지만 그는 이 사건 이후 “국회의원은 두 번 할 게 못 된다”라며 머리를 흔들었다는구나. “50년 노동운동을 하다 국회에 들어와 보니 이건 구조적으로 썩어 있더라”는 것이지.

1996년 총선의 해가 왔을 때, 다시는 국회의원을 하지 않겠다고 손사래를 치는 이 사람을 그냥 놓아둘 수 없다는 이들이 그를 ‘고문’하다시피 설득했고 그는 이번엔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지만 낙선하고 말았어. 낙선한 뒤로도 부지런히 움직이던 그는 민주노총에서 노동법 개정 관련 회의를 늦게까지 한 다음 날, 조카와 함께 아차산 등반에 나섰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한다. 1927년생이었으니 단명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보내기엔 너무 아까운 나이. 제대로 쉬어본 적도 없이 숨 가쁘게 지냈던 예순아홉 해의 일생이었단다. 복잡한 정치 투쟁보다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말룡이 성님’ ‘영감님’ 소리를 들으며 각지의 사람들과 이야기하기를 즐겼던 노동계 큰형님, 딱 한 번 국회에 들어갔다가 구조적으로 썩어버린 국회에 찬물을 끼얹으며 정신 차리라고 호통을 쳤던, 그래서 미친 사람 취급도 감수해야 했던 대한민국 국회의원 김말룡은 그렇게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났단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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