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아이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공감합니다. 남에게 양보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습니다.” 학기말 행복성장기록부(통지표와 유사)를 작성하다가 키보드 누르는 손가락을 자주 멈춰야 했다. 아이마다 생활 모습과 특징을 적어줘야 하므로, ‘착하다’를 구체적 맥락을 살린 표현으로 바꿔야 했기 때문이다. 착한 아이를 ‘착하다’라고만 적으면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상담 주간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혹시 맞고 다니거나 그런 건 아니죠?” 나는 그저 아이가 학교생활 잘 하느냐는 질문에 “착해서 친구들과 원만하게 지낸다”라고 답했을 뿐이다. 착한 아이를 둔 부모는 표정이 어두워지며 걱정스레 추가 질문을 했다. 온갖 수식어와 집안사, 양육 환경 이야기 등을 빼고 핵심만 간추려보면 “우리 애가 손해 보고도 가만히 있는가?”였다.
물론 “활달하고 씩씩하다”라고 대답해도 “다른 애들 괴롭히거나 그러진 않죠?” 같은 반문이 나온다. 그렇지만 목소리나 표정에 담긴 불안감이 “착하다”에 비해 훨씬 덜하고, 도리어 자부심과 만족감까지 느껴진다. 요즘같이 위험천만한 세상에 착한 건, 순진해 빠져서 남 좋은 일 시키고 손가락 빨기 좋은 속성인 걸까?
학부모만 탓할 수 없었다. 아이가 선량하고 사려 깊다는데 싫을 리 없다. 다만 ‘헬조선’, 각자도생으로 대표되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봐 노파심이 드는 것이다. 모두가 10대들의 인성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만 정작 본인 자녀에게는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면…’ 하는 심리로 타인을 견제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반칙을 조금 쓰더라도, 사회 전반이 도덕적으로 바뀔 때까지 스스로를 보호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착한 마음은 경쟁이 일상화된 한국 사회에서 하등 쓸모가 없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도덕과 신뢰가 없으면 이 사회는 잠시도 버티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타인의 심리와 욕구를 잘 읽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훨씬 높다. 착한 아이가 생존에 유리하다는 의미다.
학교만 봐도 그렇다. 우리 반에는 학생 22명이 있다. 나는 열 명 내외의 학부모와 잠깐씩 대면했을 뿐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학부모는 학교와 교사를 믿고 아이들을 장시간 맡긴다. 아이들이 하교하고 들르는 분식집 아저씨는 3000원을 받고 기꺼이 맛있는 떡볶이 한 접시를 내어준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금융, 복지, 상업, 치안 등 사회의 모든 영역이 사람들 간 신뢰와 협동을 바탕으로 한다.
‘착함’은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훌륭한 자질
아이들은 장차 기업가나 노동자가 되어 경제생활을 할 것이다. 물건을 팔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필요나 취향을 고려하지 않으면 사업은 망한다. 기업가는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남이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는 선호하는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이 조직에 필요한 인재임을 강조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타인을 위한 생활을 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셈이다.
착한 아이는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훌륭한 자질을 지니고 있다. 역지사지의 미덕은 인간관계뿐 아니라 경제적 관점에서도 긍정적이다. 도덕적 삶, 착하게 사는 인생을 효용성에 비추어 설명하고 설득하는 게 언짢고 불편하다. 그럼에도 아이가 착하다는 말에 가슴 한편이 무거워지는 학부모를 자꾸 만나게 되는 교사의 마음은 더 착잡하다. 착한 건 나쁜 게 아니다.
-
선생님 수능이 뭐예요?
선생님 수능이 뭐예요?
이준수 (삼척시 도계초등학교 교사)
지난 12월12일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성적이 발표되었다. 대입 스트레스와 결별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수능을 떠올리면 왠지 주변 공기가 차갑게 느껴지고 긴장된다. 대학생이 되고...
-
“왜 교대 교육과정에 행정 업무는 빠져 있나”
“왜 교대 교육과정에 행정 업무는 빠져 있나”
이준수 (삼척시 도계초등학교 교사)
‘제발 정보 업무만은 아니기를.’ 2018학년도 업무 배정 발표를 앞두고 간절히 기원했다. 담임을 주어도 좋고, 어떤 학년을 배정해도 좋으니 정보·전산 업무만 맡지 않게 해달라고 ...
-
인성 교육도 이벤트가 되는 학교
인성 교육도 이벤트가 되는 학교
이준수 (삼척시 도계초등학교 교사)
학부모 총회와 상담 주간을 준비하며 학습 관련 자료를 잔뜩 쌓아두었다. 올해부터 ‘2015 개정교육과정’이 적용되니 학업에 신경 쓰는 학부모들이 많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예상은...
-
교사의 일상 흔드는 ‘스승’
교사의 일상 흔드는 ‘스승’
이준수 (삼척시 도계초등학교 교사)
“스승의 날 축하드려요. 저도 꿈이 초등학교 선생님이에요.” 스승의 날 한 제자가 곱게 접은 손편지를 내밀었다. 카네이션 생화와 선물은 모두 돌려보냈지만 커서 친절한 선생님이 되고...
-
“대학 독립 만세” 외치고 싶다가도
“대학 독립 만세” 외치고 싶다가도
이대진(필명∙대학교 교직원)
최근 한 대학 총장의 발언이 화제가 됐다. 교육부가 2022학년도 대학입시 개편안에서 신입생의 30% 이상을 정시모집으로 선발하도록 권고했는데, 이 총장이 “우린 그렇게 못하겠다”...
-
스마트폰 중독을 걱정해서?
스마트폰 중독을 걱정해서?
이윤승 (서울 이화미디어고 교사)
“역시 프랑스는 대단하다.” 동료 교사가 기사를 보고는 감탄한다. 대체 무슨 기사를 보고 놀란 것인지 물으니, 프랑스 학교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고 한다.‘...
-
아이를 조건 없이 믿나요?
아이를 조건 없이 믿나요?
이준수 (삼척시 도계초등학교 교사)
어쩌다 보니 발령 이후 3, 4학년 담임을 연거푸 맡았다. 올해는 여섯 번째 4학년 담임이었다. 학교 사정과 학생 특성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3, 4학년은 교사들에게 선호도...
-
‘노는’ 아이가 걱정되나요
‘노는’ 아이가 걱정되나요
이준수 (삼척시 도계초등학교 교사)
‘노는 땅을 뭐라고 번역해야 하지.’ 학교 영어 원어민 강사와 대화하던 중 말문이 막혔다. 예전에 닭과 토끼를 길렀던 공터를 지나는 참이었다. 지금은 동물이 없고 텅 비어 있기에 ...
-
누구나 유튜버가 될 수는 없잖아요
누구나 유튜버가 될 수는 없잖아요
이준수 (삼척시 도계초등학교 교사)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반 남자애 두 녀석의 장래 희망이 대통령이었다. 그 둘은 서로 자기가 진짜 대통령이 될 거라고 걸핏하면 으르렁거렸는데, 주변 친구들은 친한 녀석을 편들기 ...